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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 시조 섭리, 자연이 전하는 은혜로운 울림과 순수 정신

by 토끼투끼 2024. 11. 23.

박재삼은 한국 시문학사에서 자연을 노래하며 순수한 정신을 추구한 시인으로 손꼽힌다. 그는 시조라는 전통적인 형식 속에 현대적 감각과 깊은 사유를 담아내며, 자연의 섭리를 예민하게 포착했다. 그의 작품은 고전적이고도 신선한 울림을 가지고 있다. 특히,「섭리」는 그가 문단에 데뷔하며 발표한 시로, 한국적 정서와 자연에 대한 동경이 아름답게 깃들어 있다. 이 시는 단순히 자연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이 내포한 본질적인 의미와 인간에게 주는 내적 여운을 탐구한다. 이번 글에서는 박재삼의「섭리」를 중심으로 그의 시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박재삼 시조 섭리, 자연이 전하는 은혜로운 울림과 순수 정신

섭리 박재삼 

섭리 / 박재삼

그냥 忍苦하여, 樹木이 지킨 이 자리와

봄을 깔던 하늘마저 알고 보면

무언지 밝은 둘레로 눈물겨워도 오는가.

 

신록 속에 감추인 恩惠로운 빛깔도

한량없는 그 숨결 아직은 모르는데

철없이 마음 설레어 미소지어도 보는가.

 

어디에 물레바퀴가 멎는 여운처럼

걷잡을 수 없는 슬기 차라리 잔으로 넘쳐

동경은 원시로웁기 길이 임만 부르니라.

-(1955년 『현대문학』)

 

박재삼의 「섭리」는 시조 형식으로 된 작품이다. 이 시인은 현대시를 써 오면서도 시조에 대하여서도 꾸준히 관심을 보여서 시조로 엮어진 시조 시집을 낸 바도 있다. 「섭리」는 시대와 작품과의 관계를 깨닫게 해주고 있다. 이 작품은 그가 문단에 등용할 때의 작품이므로 우선 '인고'와 같이 지나치게 한자를 많이 쓰고 있는 것이 눈에 띄인다. 아마 지금 같은 소재로서 「섭리」라는 시조를 다시 쓴다면 이처럼 많은 한자를 쓰지 않으리라는 생각이다. 유치환은 이 시조를 추천하면서 내가 이 작품을 내세움은 그 형식을 보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시를 본 때문이다. 꽃 속에 꽃을 보고 미소 속에 미소를 능히 볼 수 있는 고운 감성이 언어의 교치를 입어 시로서 완벽하게 이르른 감이 있다'고 했다. 연의 '어디에 물레바퀴가 멎는 여운처럼/걷잡을 수 없는 슬기차라리 잔으로 넘쳐/동경은 원시로웁기 길이 임만 부르리라.' 같은 구절들이 바로 그것이다. 자연을 보되 자연 그 자체만이 아니라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여운과 기쁨의 충만성들도 깊이 보는 박재삼의 감성은 가히 우리나라에서 자연을 읊는 시인으로서 첫손 꼽아도 손색이 없을 줄 안다. 그가 문단에 나오면서 쓴 당선소감의 몇 구절을 보자. 나는 아무 유파에도 미쳐 흘러 들지 않게끔 나대로의 순수한 정신의 지향을 잘 지탱해가면 그만일 것이다. 요컨대 정신의 이기를 고집하며 아무것도 광신하지 않을 것이다. 바보같이 살아도 세상을 보는 눈만은 흐림없이 다스려야 하겠다.' 박재삼은 이 말대로 이제껏 시를 써오고 있는 시인이다. 나는 박재삼의 시에서 늘 변하지 않는 순수정신을 만난다.

 

「섭리」의 아름다움과 사유

「섭리」는 단순한 자연의 묘사를 넘어,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정서적·철학적 울림을 담고 있다. 첫 연에서 시인은 “忍苦하여, 樹木이 지킨 이 자리와”라는 구절로 자연의 끈기와 인내를 노래한다. 여기서 ‘인고’는 단순히 어려움을 견뎌낸다는 의미를 넘어서, 존재 자체가 지니는 숭고한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한자가 많아 다소 고전적인 느낌을 주지만, 그 속에서 자연이 인간에게 전달하는 은혜로운 메시지가 돋보인다. 특히, “봄을 깔던 하늘마저 알고 보면 / 무언지 밝은 둘레로 눈물겨워도 오는가”라는 구절은, 봄 하늘 아래 펼쳐지는 생명의 환희와 그 이면의 뭉클한 감동을 동시에 포착한다.

두 번째 연에서는 자연 속에서 느끼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표현된다. “신록 속에 감추인 恩惠로운 빛깔도”는 자연이 지닌 무한한 생명력과 은혜로움을 상징하며, “철없이 마음 설레어 미소지어도 보는가”라는 표현은 인간이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경이와 순수함을 드러낸다. 이 구절은 자연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 또한 자연을 통해 본능적으로 감응하고 교감하는 순간을 섬세하게 잡아낸다.

마지막 연에서는 물레바퀴가 멎은 여운처럼 시간과 자연의 무한성을 노래한다. “걷잡을 수 없는 슬기 차라리 잔으로 넘쳐”라는 구절은 자연이 가진 지혜가 넘쳐흐르는 모습을 시각화하며, “동경은 원시로웁기 길이 임만 부르니라”라는 표현은 자연을 향한 인간의 근원적인 그리움과 동경을 나타낸다. 박재삼은 이처럼 자연을 통해 삶과 인간 본질에 대한 통찰을 끌어내는 데 탁월하다.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시인의 사유가 투영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박재삼의 시와 순수 정신

박재삼의 시는 시대를 초월한 자연에 대한 사랑과 순수한 정신의 탐구를 담고 있다. 그의 당선 소감 중 “정신의 이기를 고집하며 아무것도 광신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은 그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는 특정 유파나 사조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과 삶을 바라보는 순수한 눈으로 시를 써왔다. 이는 그의 작품이 여전히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섭리」는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교감을 아름답게 엮어낸 시로, 박재삼 시인의 시작점이자 그의 문학 세계를 응축한 작품이다. 유치환이 이 시를 추천하며 언급했던 “꽃 속에 꽃을 보고 미소 속에 미소를 볼 줄 아는 감성”은 박재삼의 시가 가진 독창성과 깊이를 대변한다. 그는 자연을 통해 단순한 감탄이나 관조를 넘어, 우리 삶의 본질을 성찰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과 기술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 속에서 박재삼의 시는 자연에 대한 경이와 겸손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자연의 섭리를 노래했던 그의 시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속한 세상과의 관계를 다시금 돌아보고, 잃어버린 순수함을 되찾을 수 있다.「섭리」는 단순히 과거의 작품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전하는 시로 남아 있다.

박재삼의「섭리」는 단순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을 넘어, 자연 속에 담긴 인간과의 연결 고리를 섬세하게 탐구한다. 시인의 눈에 비친 자연은 정적인 풍경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깊이 맞닿아 있는 역동적인 존재다. 이는 자연을 단순한 배경으로 소비하는 현대의 시각과는 뚜렷이 대비된다. “철없이 마음 설레어 미소지어도 보는가”라는 구절은, 자연 앞에서 스스로를 잊고 순수한 감정을 느끼는 인간의 본성을 환기시킨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감정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지만, 박재삼의 시는 우리가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도록 돕는다. 그의 시는 자연을 매개로 인간의 감정과 삶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며, 독자로 하여금 자연에 대한 깊은 존중과 동경을 느끼게 한다.

또한「섭리」는 자연을 바라보는 데 있어 '시간'이라는 요소를 떠올리게 한다. 자연의 섭리는 순간의 아름다움에서 그치지 않고, 시간이 흐르며 천천히 드러나는 진실을 품고 있다. 물레바퀴의 여운처럼, 자연은 서서히 자신을 열며 인간에게 잔잔하지만 깊은 가르침을 준다. 박재삼은 이를 통해, 인내와 기다림의 미덕을 일깨운다. 우리는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결과를 추구하지만, 그의 시는 자연의 리듬에 맞춰 천천히 흐르는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한다.「섭리」는 단순한 자연 찬미를 넘어, 자연 속에서 인간의 삶의 방식과 철학을 재정립하는 하나의 지표로 작용한다. 박재삼의 시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멈추어 돌아볼 시간을 선물하며,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을 열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