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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독자의 자유, 그리고 시교육의 딜레마

by 토끼투끼 2024. 11. 20.

시는 자유롭다. 최소한 이 짤막한 한 마디에는 시를 짓는 창작자와 시를 읽는 독자에게도 다 해당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시를 창작하는 시인의 입장에서 보면 한편의 시를 짓기까지 한 개인이 가진 시의 여러 가지 기능들이 동원되기 마련이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회. 윤리적인 제약성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약과 고통 속에서라도 한편의 시가 탄생되는 것은 시인이 가진 자유혼의 정신이 큰 물줄기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물리적 억압이나 힘으로도 억누를 수 없는 표현의 자유스러움을 시인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편의 시에는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상의 기쁨과 고통이 동시에 공존한다.

 

시와 독자의 자유, 그리고 시교육의 딜레마

 

시 교육의 문제: 창작과 감상의 길을 잃다

꿈꾸는 자로서의 무한대의 상상력이 있는가 하면 현실에 발디딘 자로서의 아픔과 고통이 어떤 산문체보다도 리얼하게 새겨진다. 시가 산문과 다르다는 것은 그 형식적인 문제 이전에 그 표현되는 심도가 다르다는 뜻이다. 기쁨이라든지 아픔의 심도가 표피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의 깊은 곳까지도 그 신경이 맞닿아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좋은 시는 그러하다. 오늘날에는 '문학독자학'이라는 비평의 한 장르가 생길 정도로 한 편의 시를 향수하는 독자층도 결코 가볍게 취급할 수가 없다. 자유롭기로 하면 시를 읽는 독자가 가장 자유로운지 모른다.

독자는 정말 시에 있어서 자유로울까? 일차적으로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그 독자가 자기 나름대로의 시의 감상으로 한 편의 시를 소화한다면 문제가 간단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폭넓게 우리가 생각의 폭을 확대한다면 다른 의미를 가진다. 개개의 독자가 모여서 일군의 독자층을 형성할 때 그것은 사회학적인 측면에서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 집단으로서의 독자층이라는 것은 한 사회가 형성하는 문화층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제기된다. 문화도 오늘날에는 유행의 물결을 탄다고 할 때, 일군의 독자층에 의하여 오도된 문화가 그 주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학적인 요건에 의해 서건 저질의 시가 베스트셀러의 시집으로 등장하고(베스트셀러가 갖는 가장 허점의 하나이지만) 그것이 바로 좋은 시로서 인식되어 많은 독자들이 읽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오도된 문화의 표본이라고 지적치 않을 수 없다. 더우기 더 무서운 것은 문화의 유행을 따라 많은 시인들이 베스트셀러 시인류의 시를 양산하려는 꿈에 편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모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첫째는 시의 교육에 문제가 있다. 내가 시를 이야기할 때 자주 예를 드는 시로서 쿠사노 심페이(草野深平)의 「겨울잠」이라는 시가 있다. 이 시는 흰 백지 한 장에 시 제목 겨울잠'과 '점' 하나밖에 없는 시이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을까. 이때 우리는 이 시를 쓴 시인의 공간적인 미학의 배경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점'은 인간에 대한 하나의 기호적 상징이고, 점을 찍어논 백지는 하얗게 눈은 벌판이란 공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눈 온 황량한 공간 속에 갇혀 있는 인간의 고독성을 암시하면서 우리들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하게 만들고 있다.

 

시 교육의 문제

우리나라의 시인 중에서도 이런 시인은 있다. 한하운의 「개구리」란 시가 그 예이다. 이 시는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 가//라랴 러려/로료 루류/르리라'라는 6행으로 구성된 시이다. 이 시를 우리들이 단순히 교과서에서 배운 식대로 개구리 소리를 의성화한 시라고 이해한다면 시를 읽는 아무런 감동도 받을 수 없고, 이 시에서 어떤 아름다움도 찾을 수 없다. 이 시에서 우리가 이해하여야 될 것은 천형의 병이라고 일컫는 문둥병에 걸린 한하운이 이 시를 쓰게 된 쓸쓸한 위안과 진실을 보아야 한다. 「개구리」에서 의성어는 단순한 의성어가 아니다. 유성음으로 흐르고 있다. 어디에도 위안 받을 곳 없는 문둥이 시인 한하운이 어느 여름날 밤 길을 가다가 개구리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 개구리 소리는 이 시인에게 어느덧 자기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유년시절로 흐르게 한다.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가 어머니 품에 안겨 모국어를 자랑스럽게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배우던 시절로 흐르게 한다. 적어도 이런 이해가 있을 때 이 시에는 한 없는 감동과 진실이 담겨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이다.

「르나르의 박물지」라는 시집에 보면 「뱀」이라는 시 제목에 '아너무 길다'라는 한 줄로 된 시가 있거나 「개미」라고 하고 '333'의 숫자를 나열한 것들도 있다. 이런 시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사물의 그 특징을 정확히 보고 표현할 수 있는 훈련과 살아 있는 생물체로서의 부지런하고, 생명에의 유장성을 느끼기도 한다. 내 소견으로는 시교육이란 우선 감동으로 읽혀져야 한다. 적어도 교과서식의 도식적인 교육으로 시에서 정답을 구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시에 무슨 정답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시교육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우선 시는 고등학교 시험에나 대학입학 시험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어과정에서 시는 반드시 한 나라의 언어 중에서도 가장 핵심을 이룬 결정체이므로 많이 읽히고 감상을 하되, 시험 과정에서 정답을 요구하는 그런 식이 아니라, 한 학생이 얼마만큼 많은 시를 암송하고 있는가의 그 수준을 알아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교과서식 시의 이해는 너무나도 도식적이고 딱딱하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참고서도 마찬가지이다. 참고서에 보니 김소월의 「진달래꽃」, 신석정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박목월의 「나그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정한모의 「가을에」 등이 실려 있었다. 이들시는 좋은 시로서 정평이 나 있는 시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이 시들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 첫째는 구조면에서 거의 기, 승, 전, 결의 도식으로서 재단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시가 다 기, 승, 전, 결성을 띤다면 현대시를 읽을 맛이 없다.

현대시란 어떤 의미에서 도식적인 형식이나 틀을 파괴하는 데서부터 싹튼 시의 하나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정된 구조성을 참고서는 강요하고 있다. 그 다음에 시의 규정된 분리방법 및 편집상의 딱딱함과 천편일률성이다. 수록된 모든 시들에는 '학습안내'가 있고 이 난에는 작품 해제와 작품 요점의 정리 그리고 해당 시인의 시세계가 소개되어 있다. 이 가운데 작품 요점 정리를 보면 세부항목으로 1)분류, 2)운율, 3)소재, 4)제재, 5)주제연, 6)주제, 7)사상적 배경. 7)성격, 8)표현, 9)이미지, 10)구성.11)출전으로 나누어져 있다.

 

김소월 진달래꽃, 분류와 해석의 함정

이처럼 세분된 항목에는 나무랄 바가 없으나 참고서의 제일 앞에 실린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보자.

1)분류: 자유시. 서정시, 전통시, 낭만시, 민요시

2) 운율: 내재율(7.5조가 바탕으로 된 민요조)

3) 사상적 배경: 유교적 휴머니즘 이상은 소월시의 분류에서 문제가 될 만한 것만을 뽑은 부분이다.

김소월의 시 연구에서 보면 오세영은 한국 낭만주의시연구』에서 낭만주의 시로 김소월시를 보면서 한편으로 민요시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낭만주의 시와 민요시는 같은 성질의 개념을 지닌다. 또 전통시라고 했는데, 시의 분류에서 전통시란 개념이 있는지가 의심스럽다. 전통시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전통시인지, 우리시에는 전통시로서 무엇을 들고 있는지도 정확치 않다. 가령 김소월 자신이 민요시인으로 자신이 불리어지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다면 그의 시는 일단 민요시로서 취급하기에는 어려운 문제가 남는다. 그렇다면 김소월의 시세계는 마땅히 다른 부문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아시는 바와 같이 모든 시들은 서사시와 서정시의 두 갈래 속에 든다. 특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시라고 일컬을 때는 서정시를 말한다. 서정시란 큰 그릇 안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음식을 담듯이 여러 가지 시를 담고 때에 따라 잡다한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다. 「진달래꽃을 나는 상징주의 시로 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본 것은 틀린 관점이겠는가. 두번째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내재율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현대시의 율격을 지닌 시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괄호 안에는 7.5조가 바탕으로 된 민요 조'라고 하고 있다. 이 말 자체가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 참고서에는 7.5조란 부언하여 설명하기를 7.5조는 일본시가의 율조다. 일본 시가의 율조인 7.5조가 우리 시에 쉽게 수용된 것은, 그것이 7.3.2.3조 또는 3.4. 3.2조등의 음절 수로 분해되어 우리 전통 시가의 율격과 쉬이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7.5조는 우리 동요의 기본 율조가 되어 있을 만큼, 이제는 우리의 전통적 율격으로 편입되어 있는 실정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7.5조가 일본 시가에서 온 것이라면 민요조가 될 수 없다. 더 나아가서는 민요조와 동요조는 또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학계에서는 소월시도 마찬가지이지만 음보격으로 시의 율조를 이해하려고 한다. 시조도 3.4조의 자수의 특징 아닌 방향으로 가듯이 소월시도 3음보격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세번째로는 사상적 배경이 유교적 휴머니즘이라고 한 마디로 못박고 있는 것도 불만스럽다. 참고서의 작품해설 어디에서도 이 말의 근거가 될 말을 찾으려고 했으나 헛수고였다.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가 '유교적 전통사회의 여성으로서의 인종과 체념이 깔려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유교적 휴머니즘이라는 말인가.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의 해설은 '애이불비(哀而不悲)'라고 했는데 그것을 일컬음인가.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는 '산화공덕(꽃)'이라 했는데 이것은 불교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더욱더 못 마땅한 것은 '학력평가문제' 라고 하여 4지선다형적인 문제로 시를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그 한 예로 들어보았다. 참고서가 이러하니까 학생들은 시를 난도질하여 O·X로 감상하고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학교에서도 그 비슷하게 배운다고 친다면 시교육의 문제성은 여간 큰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한 편의 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정답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굳이 최소한의 시 감상의 올바른 길을 찾으려면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문학비평의 이론적 방법들을 소화하여서 한 편의 시를 보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