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적 담론과 창작의 지평은 시대적 흐름 속에서 진화하고 있다. 시는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자, 현실을 재구성하며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우리는 기존의 문학적 기류를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창작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한혜영의 <퓨즈가 나간 숲>과 임찬일의 <알고말고, 네얼굴>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전통적 서정시와 현대적 시각을 절묘하게 결합하며, 시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퓨즈가 나간 숲: 은유적 담론과 상투어의 경계
어딘가에 한 뭉치 퓨즈가 분명 있을 것이다. 계절과 계절의 끈을 잇고 명치 끝을 꾸욱 누르면 혼곤한 잠의 머리 절레절레 흔들며 숲은 그날처럼 홀연히 일어날 것이다. 때문에 새들은 이겨울 떠나지 않고 하늘 받들어 빈 숲을 지키고 있다.
한혜영, <퓨즈가 나간 숲> 일부
한혜영의 <퓨즈가 나간 숲>에서 그 숲이 사전적 의미의 숲이 아님을 '퓨즈가 나갔다'에서 알 수 있으며, 여기에 시적 장치의 신선함이 있다. 사전적 의미의 숲이 아니기 때문에 숲을 '빈 숲'이라고 본 시각을 이해하지만, 겨울이라고 하여 잎없이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만이 즐비한 빈 숲이 있는지 모르겠다. 겨울이면 잎이 모두 저버리는 단일종의 나무로 빚어진 숲은 겨울에 빈 숲이 될 것이다. 그렇지않기 때문에 빈 숲은 실재하는 빈 숲이 아니라 '퓨즈가 나가버린', 즉 사랑이 부재하고, 인간의 냄새가 부재한 인간의 빈 숲에 대한 은유적 담론이다.
'푸르던 기억, 사랑의 불, 겨울의 어둠, 위선의 잎새, 사랑의 잎새, 계절의 끈'처럼 관념 및 추상으로서 비가시적 지시어와 가시적 지시어가 상호교류된 은유적 장치가 이 시의 압권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가령 '사랑의 흔적, 한줄기 빛, 오늘의 상처' 처럼, 그리고 '가슴은 이리훗훗한 그리움이다. 새들은 이 겨울 떠나지 않고 하늘 받들어 빈 숲을 지키고 있다' 등 상투어의 건강성에 침입당할 가능성이 크다. '퓨즈가 나간 숲' 등이 지닌 언어의 조형미가 상투어의 침입으로 인하여 그 미적 가치를 추락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은유적 장치, 특히 의인법에 의한 자연상을 노래하는 시적 담론은 이 시점에서 결코 새로운 구조가 아니지만, 의인법만큼 은유적 담론에 적절한 수사장치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 수사장치에서 출발한 이 시의 구조는 그 점으로 성공적이지만, 반면 새로운 언어배열을 조탁하지 않은 점으로 진부의 늪에 빠질 위험이 있다.
알고말고, 네 얼굴: 대화체와 기억의 단절
남은 것이라곤 적어 놓은 너의 전화번호연락처를 알았으니 가끔 전화라도 하마만나자, 만나자, 하다보면 그 말이 씨가 되어 이 세상 어느 한구석을 차지하고서 끊어진 것들 가슴속 이야기로 이을 날이 있겠지
임찬일, <알고말고, 네얼굴> 일부
임찬일의 <알고말고, 네얼굴>은 명사형의 제시로 판에 박아온 제목 유형을 깨고, 대화체를 제시한 점이 독특하다. '알고말고'라는 말은 모를 수도 있다는 전제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왜 모를 수도 있는 지에 대한 상황을 '세월, 옛날, 끊어진 것들' 등의 지시어가 보여준다. 90년대 들어 강화되어온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사랑, 그 중에서도 인간성 회복의 차원은 누누히 노래되어 왔지만, 시인마다 어떻게 인각하느냐에 따라 각자의 개성이 존재하듯이, 임찬일은 국민학교때 친구를 두 아이를 둔 어른이 되어서 만나게 되는 절차를 통해서 도시적 초고속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재를 되비추는 각성의 기회를 마련한다.
'남은 것이라곤 적어 놓은 너의 전화번호'에서 처럼 우리 현대인은 숫자로서 기억되는 기호의 존재일 뿐이다. 그 전화번호마저 잊어버리면 만남의 기회는 상실될 것이며, 전화번호를 기억한다해도 언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단지 '이을 날이 있겠지'라고 확신없는 기대를 할 뿐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격언을 매개하여 과거의 삶을 현재화시키고 있으나, 현재는 이미 말이 씨가 되지않는, 힘잃은 말의 세상이기 때문에 역설에 의한 현실반추가 새롭다.
친구와의 전화내용을 매개하여 오늘의 우리 모습을 반추하는 반성의 자세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시적 구성미, 역설의 의식구조가 돋보인다. 반면 상상력의 공간이 단조로우며, 담고있는 메세지 역시 단편적이다. 대화체에 의한 언어미가 좀더 자주 사용되었어도 좋았을 것 같다.
새로운 시적 가치 창출의 필요성
신춘문예 당선시들은 서정시의, 서정시인의 본류를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90년대에서, 특히 전년도의 시적 기류에 연계되는 점이다. 이는 후배시인은 선배시인의, 그리고 문학사의 영향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으나, 동시에 실험정신에 투철한 현실접근이 부족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등단이라는 문학제도권으로 들어오기 위한 출발의 시점에서 전대의 문학적 기류를 수용할 수밖에 없겠지만, 또 오랜 시작 경력에도 불구하고 재평가의 기회를 마련하는 자세 등은 끊임없는 창작의 채찍질이란 점에서 실험정신에 가깝다.
실험정신은 낯설은 시적 장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 창조의 자세이며, 그 새로움에 따라 장르적 새로움 역시 동반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세는 물론 등단을 향한 신인들만의 목이 아니라, 기성·신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창작의 본질적 자세이다.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맞는 현시점에서 창작의 새로움을 기대해 본다.
더불어 중심가치가 탈중심된 세기말이라는 요즈음은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정신적 기류가 모색되어야 할 시기이다. 탈중심이라는 기류속에서도 정보라는 제3의 물결이 중심으로 자리할 모양이다. 산업중심에서 밀려났던 인간중심은 이제 정보중심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정보의 부속이라는 위상에 속할 때, 시문학이 지닌 정보가치는, 존재가치는 어떠한 것일까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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