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월 1일자 신문에서 맨먼저 찾게되는 지면은 신춘문예당선작이 게재된 페이지다. 그중에서도 시장르를 먼저 찾게되는데, 그러한 이유는 시에 대한 관심에서 뿐만이 아니라, 신춘문예발표사가 늘 시장르를 우선적으로 발표했던 기억에서 말미암기도 하다. 그러나 올해 서울의 일간지 중 1월 1일자 신문에 시당선작을 발표한 신문은 두 군데에 불과했고, 어떤 신문은 1월 7일에야 발표하여 지하철역 구내까지 신문구입하러 다녀오기도 했는데, 일요일이라서인지 진열해놓지도 않아서 다음날에야 이리저리 수소문 끝에 간신히 구입할 수 있었다.
새해를 여는 문학의 시작, 신춘문예의 의미와 흐름
원고마감일은 다가오고 신문은 없고, 그래서 해본 생각인데 각 일간지가 내년부터는 1월 1일자에 시당선작을 게재하길 바란다. 다른 장르에 비해 지면점유도 적고, 정리하기도 좋고하니 그리했으면 좋으리라 생각한다. 신춘문예당선의 새소식은 당선한 시인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문학제도권이라고 할 수 있는 문단의, 그리고 시를, 문학을 사랑하는 이땅의 모든 독자에게도 역시 새소식이며 기다림의 대상이다. 그것은 新春의 이 지닌 기운으로 말미암아 새해를 새롭게, 또는 기대에 차서 시작해야하는 준비생들에게는 가장 절실한 페이지에 해당하리라.
또 문학제도권의 평가를 받은 신인들의 작품이 등용문의 문을 어떻게 넘었는지 접하는 것은 전년도의 문학적 기류도 더불어 조망되며, 문학사적으로도 어떤 영향관계에 놓이는지, 그리고 어떠한 새로움을 지녔는지 궁금한 사항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신춘문예가 문학현장에, 그리고 문학사적으로 어떤 위치인가를 생각하면서 담지된 새로움을 파악한다. 먼저 시인들의 시적 자세를 기준하여 당선작을 분류하면, <안개의 도시>(한국)와 <운천리 길>(서울)은 서경을 배경하여 타자를 대상화한 서정의 자세를 보이고 있고, <나의 가을 4>(경향)은 자아중심적 자세를, <부의>(조선), <오월>(동아), <퓨즈가 나간 숲>(중앙), <알고말고, 네얼굴>(세계)은 인간성 회복과 생명성 지향의 서정을 보인다.
임동윤 <안개의 도시> 감상평
안개 속에 좀처럼 잠 깨지 못하는 도시
도청지붕에서 아침 햇살은
젖은 안개를 하나씩 꺼내 말린다
요선동의 허름한 집에서는 해장국이 펄펄 끓고
벌써 겨울이 시작되고 있다, 간 밤의 숙취를 푸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어제보다 한결 든든해져가고
가을의 피가 마르는 것을 나는 느낀다
잎새들이 하루가 다르게 길바닥에 쌓이고
환경미화원들의 새벽이 더욱 바빠진다
청소차에 실려나가는 푸른 꿈의 잔해들
첫눈이 오면서 다시 도시는 얼어붙을 것이다
겨울 안개도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임동윤, <안개의 도시> 일부
가을에는 새벽에야 젖은 안개가 걷히지만, 겨울에는 거꾸로 새벽쯤에 찾아든 안개가 한낮이 되어서야 걷히는, 가을안개와 겨울안개의 대비를 통해서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호반도시의 삶을 남루와 환상의 대비속에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구체적 시간대는 봄.여름이 아니고 가을·겨울의 생활상이 부각되어 있지만, 사계절의 변화와 무관하게 규칙적으로 돌고있는 헐어진 도시의 삶이 주류를 이룬다. 그 헐어진 도시의 모습을 호수에서 불어온 안개가 환상적 아름다움으로 위장하는 작용을 하고 있다.
그 위장에 덮인 실체 중의 하나, 즉 문명적·삶의 상징물인 댐의 축조를 부정하는 자세를 천식에 걸린 화자와의 대비로서 강조하고 있다. 문명의 이기에 의하여 서경적 아름다움이 파괴되는 데 대한 부정의 시각은 이미 새로운 소재. 주제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 산업화의 물결이 밀려들면서 이와 같은 시적 자세는 이미 하나의 문학사적 맥을 이어왔다. 물론 그 맥의 흐름은 계속 다음 시기에도 이어져 가야할 것이지만, 거기에는 계승. 변모에 의한 창조적 자세 또한 담지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신춘문예의 당선작에 나타난 계승보다는 변모가 어떤 것인가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변모의 창조성을 언어의 새로움, 배열의 새로움, 구성의 새로움에 둔다고 할 때, <안개의 도시>는 이미 낯익은 언어의 배열이며, 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순차적 • 평면적 시간질서라는 점, 낯익은 도시적 소재라는 점 등으로 새롭게 부각되는 점이 적다.
더욱이 화자는 천식에 걸려있고, 화자의 시선은 타자의 삶을 관찰하는 데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주체적 삶을 위한 화자의 치열한 대응자세가 부재하며, 오히려 안개라는 환상속에서 평화를 꿈꾸며 정태적 자세에 머무는 패자적인 비극의 서정을 담고 있다. 물론 병고칠 여력도 없어 보이는 천식환자가 주체이기 때문이겠지만.
그러나 임동윤 시인의 오랜 시작경력을 대변하듯이, 그는 묵은 소재•묵은 언어를 탄탄한 시적 구성미로 끌어올리고 있으며, 가을의 장치에서 가을과 겨울 사이의 장치로, 마침내 겨울의 장치에 닿는 흐름이 자연스럽다.
부정되어야 할 대상을 구호처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은폐의 자세로 견지한 점도 탄탄하다.
우리 현대시는 모순의 현실과 대상을 더러는 증오의 시선으로 그려내기도 했다는 점에 비출 때, 서정시의 본류이며, 시인의 시인적 성찰적 본류이기도 한 은폐의 자세는 분명 미덕에 해당한다. 그것은 인내심과 극기의 절제에서 가능한 시적 장치이기 때문에, 더러는 풀어헤쳐졌던 95년도의 시적 기류를 정비하는 계기를 마련한 듯도 싶다.
물론 95년도에도 서정시의 본류를 찾고자 하는 자세가 견지됐기 때문에, 이와 같은 흐름이 전년도에서 이어진 서정시의 흐름임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엄한결, <운천리 길> 일부 감상
고향이 그리운 노인들 운천리에 모여 산다 삶은 늘 깃이 짧아 겹겹으로 껴입은 속옷을 고스란히 드러내보이지만 가슴 속을 흐르는 고향 생각만은 꼭꼭 여미며 산다. -중략- 삼팔교 난간 밑으로 어둑히 풀리는 한탄강을 건너 여전히 사병 혼자 집총 차렷 자세인 검문소를 지나면 그곳에 운천리를 가는 길이 있다.
엄한결, <운천리 길> 일부
염한결의 <운천리 길>(서울)은 민통선 근처의 '운천리'란 구체적 마을의 헐벗은 삶과 실향민 노인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아름답다. '삶은 늘 것이 짧아 겹겹으로 껴입은 속옷을 고스란히 드러내보이지만'이라거나, '소매깃을 빠져나온 내복이 시린 손등을 덮어줄 때' 등의 시구는 제도권에서 밀려난 주변부의 삶에 대한 성찰적 자세를 담고 있다. 흔히 통일시라고 명명되는 일군의 기존 시와는 달리 통일을 향한 분노의 목소리가 없이 비극적 서정을 근간으로 통일을 지향한 시적 자세에 신뢰를 보낸다.
임동윤의 시가 패자적 비극 서정이었다면, 염한 결의 시는 객관적 비극 서정시로서 화자는 어딘가에 숨어서 시속의 대상들을 관찰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 강, 강물, 안개 등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한 수사적. 즉 언어의 연금술적 자세가 약하다. 길·강·물 등의 자연물은 지나온 시에서 충분히 일상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언어의 조직이 새롭지 않을 경우 평이한 시로 떨어지기 쉽다.
이는 이야기시의 구조에서 때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그와 같은 현상이 과거의 시적 결과였다면, 같은 계열의 문학사적 맥락에서 이는 지양되어야 할 요소이며, 다음 세대의 시가 맡아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시의 전반부는 안개, 강물 등이 추상적 지시어로 쓰이다가, 후반부에서는 삼팔교, 한탄강 등 구체적 길, 강 등이 나타나는데, 추상태와 구체태의 상호교합작용이 밀접히 좀더 탄탄하게 이루어졌으면 한다. '길'이라는 지시어는 여덟번, '강'은 한탄강을 포함해서 여섯번, 또 '나무들이 자꾸 손가락을 다치는, 나무는 자꾸 손을 다치고, 나무는 자꾸 다리 아프고' 등에서는 '자꾸'라는 단어도 자꾸 쓰이는데, 물론 반복에 의한 시적 효과도 있겠지만, 길. 강 등은 길 일반 · 강 일반이 아니라 구체적 길과 강으로서 형상될 때 반복효과와 함께 더욱 생동감있는 시가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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