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상상력은 현실에 대한 단순한 비판이나 창의적 아이디어를 넘어서,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깊이 있는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이는 현재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구조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 나은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비판적 상상력은 단순한 창의력과 달리,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분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사회적 변화의 기틀을 마련하거나,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판적 상상력 예시
어머니는 왜 안 오시나이 다저녁까지 왜 어둠에 몰리는 햇살을 떨어진 앞가슴에 안고 조리에 된장을 받쳐 풀며 이 세상에 맏이 된 나, 모든 맏이 된 나는 시름겨워
안 오시나 못 오시나, 숨은 어머니 어머니 대역이 된 누나 그리고 언니가 지어주는 저녁을 묵묵히 고개 떨구고 먹는 이 세상의 동생들 그렇게 혼자 일찍 가시면 어머니야.
된장국을 끓이며 쪼그려 앉은 여중생 이를테면 소녀 어머니는 알지만 모르고 모르지만 알아
바닥 모를 학수고대
세상의 남은 날들조리나 된장 항아리 그런 낡은 모든 부엌살림이 이제는 이 세상에 맏이 된 나, 소녀 어머니가 물려받은 빛 없는 패물
눈부실 일 없는 무거운(그렇지. 가볍지는 않지)패물끌고 다닌다.
어머니야. 어머니처럼 숨기 전까지 이진명, <또 저녁을 지으며>
소년·소녀 가장이 오늘의 우리네 가족구조를 대변해서 드러내고 있다고 하면 지나칠지 모르겠다. 현대문명의 생활상은 사고다발로, 또는 죽음의 신을 몰고 다니면서 전통적 가족구조를 해체시키고 있다. 또 비인간중심의 한 실상으로서 개인의 이기를 채우기 위해 가족을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반드시 개인적 이기심이라고만 치부해 버릴 수 없음이, 이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힘겨운 인간상을 엿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진명은 저녁짓는 소녀. 누나. 맏이. 언니· 여중생 등을 통하여 이 시대의 소년·소녀 가장의 하루를 그리고 있다. 거기에는 비판의 정신이 함유되어 있지만, 그 목소리의 토운이 잔잔하기에 서정적 비극성이 짙게 배어있다. 물론 그 비극은 시인의 개인적 실체험으로서 비극이 아니다.
이진명은 현재 소녀가장이 아니기 때문에. 이는 우리 사회의 비극이기에, 그 비극의 정조속에서 사회 비판의 정신을 만나는 것이다. 특히 집나간 어머니를 원망하는 시선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화자의 시선속에, 그리고 저녁을 짓는 일몰의 시간배경과 함께 비극의 정조는 더욱 짙다.
또 가난의 대명사 같은 우리네 부엌살림들, 가령 '조리에 된장을 받쳐풀고, 부엌에 쪼그려 앉아 된장국을 끓여야 하는' 상황들이 그러하다. 비교적 단조로운 구조, 그리고 이미 저널을 통해서 상식화 돼 버린 소재이지만, 이 시대의 소외된 삶의 모습이란 점에서,그리고 오늘의 아픈 사회상을 제시한 점에서 이 시는 감동적이다.
체험적 상상력 예시
어느덧 우리 식구는 서울을 지나가고 있다 수색은 우리 식구를 지나가지 않는다
수색은 아직도 삼표연탄과 극장, 역과 나무들이 그 옛날의 우리를 우두커니 바라본다
우리 식구엔 수색이 모르는 사내아이가 태어났고 그때 첫아이는 영어를 배우는 중학생이 되었다
수색은 비가 내려도 가지 않는다 봄이 지나가도 오지 않는다
수색은 조용하다 그곳은 아직도 다행스레 수색일 뿐이다
모든 게 사라질 때 수색은 가지 않는다 우리만이 지나간다
더러 낯설게 자고 갔던 사람들은 그립고 이 세상 어디엔가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컴컴해도 불안하지 않던 곳 옛 수색의 한낮 수색은 남고 우리들은 간다
아이는 아이 아내는 아내 남편은 남편 기실은 흘러왔다
썩은 몸 위에 아직도 수색은 가지 않고 남아 있다
서울의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어도 굴다리와 송전탑과 치킨집과 충남쌀집과 5번 종점늙지 않을 얼굴처럼 가지 않았다 속초 해남 누이 아내에게 10년이 흘렀지만, 길 건너 바라보는 수색은 반갑고 즐거워
아름답게 초라한 옛날이 보이는 것이다
지금보다 몸도 마음도 작은 식구들이 보이는 것이다
우리만 가고, 수색은 가지 않고 고향처럼 남았다
저곳에서 어머니처럼 웃고 있다 50년이 지나고 백년이 지나도, 수색은 말없이 지나가는 사람과 버스를 쳐다보고 있다가 그도 어느 날은 가고 없을 것이다
고형렬, <수색은 가지 않는다>
또는 '수색'이라는 지명을 '간다'라는 시간 또는 행위 동사태로 수식한 시각이 이 시의 일미이다. 우리는 간다. 즉 이사가고, 아이도 낳고, 발전적으로 변화한다. 그러한 삶이 도시적 삶의 유형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서울도 간다. 즉 변한다. 그러나 수색은 가지않는다. 봄이 지나가도 수색은 지나가지 않고, 사람이 지나가고 버스가 지나가도 수색은 바라만 보고 있다. 초라한 채로! 그래서 수색은 시인이 한때 살았던 아름답고 초라한 장소로서 고향 같은 곳이며, 서울의 현존하는 행정구역으로서 도시적 생활을 대변하기도 한다.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의 한 행정구역 내인 수색은, 그러나 서울의 현재적 변화와는 무관하게, 여전히 삼표연탄과 극장, 기차역과 굴다리, 송전탑이 있으며, 치킨집과 충남쌀집과 5번 버스의 종점으로 시골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라는 거대 흐름속에서 수색 조차도 어느 날엔가는 가고 없을 것이라는 상실의식을 볼 수 있다. 즉 우리네 삶 또한 이와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이 시는 수색이라는 구체적 상상의 공간에 투여된 개인적 체험을 사회의 변화상에 결부시켜 서정화 하였다. 이 시대의 소외된 공간으로서 수색이지만, 옛스러운 아름다운 추억이 있기에, 그리고 늦은 변화의 물결을 타기에 고향이미지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가시적 존재가 이 세상에 어딨겠는가?
고향도 변하고 어머니도 변한다. 이제는 고향이미지도 어머니이미지도 새롭게 상정해야 될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가지 않는 수색이 있어서 좋지만, 또 수색이 가지않기에 슬프다. 남들은 모두 발전적 연료를 사용하는 이 시대에 수색은 여전히 삼표연탄을 사용한다. 아니 삼표연탄공장이 공장지대라는 수색의 현재를 상징하기도 한다. 사회비판의 자세가 개인의 체험적 세계에 깊게 채색되어 비극적이다.
패러디적 상상력과 그 서정
저 꽃을 내 기꺼이 그대에게 꺾어 바치리 미처 뒤돌아볼 새없이 앞만 보고 과속해도 끝없이 추월당하는 잘못든 생의 고속질주를 비웃듯 순식간에도 늙음도, 흐르는 시간도 정지시켜버린 고대의 여인이여 어찌 그저 발만 동동 구르거나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을 변명삼아 맨주먹으로 땅바닥이나 치며 탄식하고 있으리
어찌 즐겨, 한때 사랑하고 사랑했던 내 청춘의 불꽃 흰 꽃타래 한 묶음 그대에게 엮어 바치지 않으리 귀신도, 물짐승도, 공중을 나는 숫컷의 새 한 마리도 그저 육향에 취해 부끄럼도 잊은 채 다투어 발정하며 길을 막는데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할 마로니에 공원 미끄럼틀 아래 매달린 쇠줄 그네를 약속 장소로 정할 수 있는 그대 위해, 내 꽉쥔 생의 핸들을 놓치지 않으려 머뭇거리리 -지금 불로 익힌 지상의 어떤 음식보다 달고 향기로운 제 몸속의 훈향에 제가 먼저 감동해, 어디론가 서둘러 닿으려는 모든 발길을 멈추게 하며 홀연 닿는 데마다 황홀한 천리향으로 타오르는 수로부인이여 살아서 닿을 수 없는 저 그리움의 절벽을 발판삼아 그 찬란하고 황홀한 열반의 정화수에 아픈 몸을 씻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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