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의 문학현상을 칭하여 흔히 연대기적 표준에 준하여 세기말의 문학현상이라고들 한다. 시간의 기준에 준하여 문학의 독특한 현상이 돌출된 것은 아닐테지만, 어쨌거나 세기말이라는 시점에 준하기라도 하듯이 문학적 특성 역시 세기말적 징후를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세기말적 문학 현상을 말하기 전에 먼저 세기말적 사회현상을 살펴보면, 후기산업사회라는 현상 속에서 탈인간화의 징후와 그에 준한 물질중심 및 대중매체 중심의 사회구조가 펼쳐지고 있다.
소비 사회에서 문학의 몰락, 예술에서 상품으로 변모하는 문학
물질 및 대중매체 중심의 사회구조는 인간을 생산주체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소비주체로 이끌면서 인간중심 및 인간간의 관계를 마모의 상태로 몰아간다. 이때 인간은 소비주체이면서 동시에 소비를 위한 객체가 되어 광고전략의 매개화로 전락하게 된다. 이와 같은 소비중심의 후기산업사회에서 문학 역시 얼마나 뛰어난 상품성을 지녔느냐에 따라, 즉 얼마나 뛰어난 판매전략에 의해 선전되었느냐에 의해, 또는 얼마나 선정적으로 독자를 유인하고 있느냐에 의해 그 문학적 위치가 아니라 상품적 위치가 결정되어진다.
문학 역시 상품성의 여부에 의해 생존의 투명성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이는 문학의 예술적 가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품적 가치가 중요한 세기말적인 한 특성인 것이다. 물론 문학작품의 생명성은 후대에 가서 당대와는 달리 평가되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그 생명성이 당대에만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물량주의의 시대에 파묻혀 버린 작품의 진가가 후대에 얼마나 들춰내지느냐의 여부는 불분명하며, 요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후대연구가들의 노력여하에 달려있겠지만, 거기에 희망을 걸기에는 작금의 현실이 그리 희망적이지만은 않는 실정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미래를 기대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오늘의 시간상에만 안주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또는 미래가 밝은 미래가 아닐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서 비롯된 현실 추수의 실상이기도 하다. 이때 문학의 위치와 그 기능 및 진가는 추락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 또한 문학의 세기말적 한 징후인 것이다.
세기말 문학의 왜곡
문자의 시대가 아니라 영상의 시대라는 이즈음의 동시대성과 어울려 텍스트에 대한 선호도는 뒤로 물러나고 있지만, 영상을 수놓는 매개물 역시 인간의 표피를 자극하는 성애적인 화상으로 점철되고 있는 실정이다. 달리 말하면, 사고하는 존재라는 인간만의 고유영역이 점차 쇠퇴하여 가고 있다는 의미이며, 더불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노력의 중요도가 약화되어 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근·현대라는 시간을 이제 갓 1세기 가량 이끌어온 우리의 문학사에서 세기말의 문학현상을 구체적으로 보면, 컴퓨터보급과 관련되어 소위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문학이라고 하는 문단제도권 밖의 현상을 그 주요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컴퓨터 보급은 글쓰기의 수고를 덜어줌과 동시에 상상력의 노력 역시 줄어들게 하고 있는 것 같다. 때문에 심사숙고한 성찰의 언어들이 언더그라운드 문학을 장식하기 보다는 찰나적이고 감각적인 언어에 의하여 인간의 표피를 자극하는 비문학성의 글들이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본문화의 호황과 더불어 쉽게 출판되는 비문학성의 서적의 범람 또한 작금의 왜곡된 문학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과 문학의 범주를 어떻게 제한할 것인가 라는 점이다. 문학이란 인간 삶의 재현이면서, 참다운 방향의 모색을 담아내는 실체라고 할 때, 세기말이라는 최근의 문학은 인간 삶을 재현은 할지언정 참다운 방향의 모색이란 점에서는 그 설자리를 잃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주로 성을 매개로 한 소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데, 그러한 소설에서 쾌락추구의 성을 위주로 한 왜곡된 삶의 소용돌이는 제시하면서, 그에 대한 방향의 모색은 빠져있다. 이때 문학이란 오직 재미위주의 기능에만 멈춰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문학의 진정성이 재미나 오락을 위한 매개물에 있는 것이 아님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문학은 작가의 고통의 산물이며, 고통스럽게 살아온 삶의 산물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토대 위에서 탄생한 문학작품과 오락위주의 작품과는 물론 그 의미행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문학이라고 일컫는 문학작품은 바로 작가의 고통의 산물이며, 고통스러운 시대가 낳은 산물이므로, 문학성이 배재된 채 출판되어 나온 모든 텍스트를 문학행위로 일컫는 최근의 추세와는 분명 구분되어져야 하리라.
그러므로 이제 문학작품은 산물로서 작품(work)이 아니라 텍스트(text)라고 칭해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텍스트에서도 작품과 한낱 기록은 분명히 구분지어져야 할 것이다.
순수예술과 대중화의 경계
순수문학, 또는 순수예술의 가치라는 것도 계급시대의 산물로서 귀족들의 삶의 척도에서 부여된 이름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수의 가치가 계급적 지위를 지향해야 한다는 측면에서의 가치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측면에서의 가치일진데, 그와 같은 가치의 비중은 대중의 시대라는 현 세태의 대중적 가치와는 구별되어지면서, 동시에 추구되어져야 할 어떤 소중한 것으로의 무게를 지닐 수밖에 없다. 물론 순수예술가들 중에서도 대중예술과의 접맥으로서 순수예술과 대중예술 간의 간격을 좁히고자 하는 일환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20세기말이, 그리고 도래하는 21세기가 바로 대중의 시대 및 대중매체의 시대일 것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가령 그 나라의 박물관에나 걸려있어야 하는 과거의 미술품들이 이제는 복사되어 소시민의 방안마다에도 걸려있어, 순수예술의 대중화 시대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한다. 앤디 워홀 같은 예술가도 화실을 공장으로 바꿔 놓으면서, 기계에 대한 찬미를 공언하고 나서기도 하고, 뻔한 이미지들을 가장 유효한 것을 선택하였다고 하면서, 예술과 예술가가 전통적으로 맺어왔던 가치에 도전했고, 그것을 전도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워홀의 이러한 작업이 그의 모든 작품 경향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그 역시 순수예술권 내에서의 유일성의 가치에 대한 작품경향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수소수 비록 산업화와 기계들의 발달로 예술의 제작이 수공에 의하기 보다는 기계의 도움으로 다량화 된다고 할지라도, 그 작품의 가치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지켜온 예술의 순수성을 저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학 역시 패러디라는 이름하에 창작적 패러디가 아니라, 도용 차원에서의 베끼기가 성행하는 세기말의 문학상황이지만, 그 진위를 구별하는 인간의 미적 안목은 소멸될 수도 없고, 소멸되어서는 안되는 고결한 품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기말이라는 연대기적 어휘가 지닌 소멸의 의미와 그에 버금가는 탈인간적 상황 및 탈문학적 상황에서도, 동시에 세기말이라는 어휘 속에 감춰진 세기초라는 새로움에 대한 기대에 어울리게, 세기말 속에서 다가오는 세기초의 신선함을 오히려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전통이 지닌 화석화된 규격의 이미지는 세기말이라는 동시대성 속에서 그 권위의 실추가 역력해지고 있지만, 그리고 위계질서의 추락이라는 부정적 현상을 초래했지만, 그러나 동시에 규격화된 전통의 권위에 도전하여 억눌린 인간의 본능을 열어놓기도 했다는 긍정적인 점 또한 외면할 수는 없다. 때문에 연대기적 흐름이든 사회구조상의 격변을 초래했든, 변화하며 흐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역사는 다가오는 21세기에는 더욱 다면적 문화현상으로 나타나리라.
21세기 문학: 순수와 대중, 전통과 변혁의 갈림길에서
문학 역시 순수문학의 영역을 지키려고 애쓰는 집단과 이를 거부하고 파괴하여 대중적인 어떤 것을 돌출해 내려는 대중문학의 집단으로 크게 양분될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이 양자의 중간 지대에서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접맥을 시도하는 집단 역시 새롭게 그들의 면모를 과시할 것이다. 또 문학이 문자만을 매개체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상매체와의 접맥 속에 문학장르의 고유성이 파괴되기도 할 것이고, 문학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퍼포먼스(Performance)로 나타나는 문학의 한 실행이 대두되기도 할 것이다. 순수문학의 집단이 소수 정예부대로써 그들의 고독한 자리를 지키는 현상과, 동시에 문학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퍼포먼스라는 문학의 문화적 실행이 보다 더 활성화 될 것으로 보인다. 즉 문학이라는 전통적인 고유 영역이 확대되면서, 그 확대된 영역 안에서 세분화되어 실시되는 다채로운 문학행위들이 21세기를 수놓을 것으로 보인다. 어찌했거나 문학의 색깔과 형태는 삶의 유형에 따라서 그 옷을 달리 입기 때문에, 정보화 시대,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21세기의 추세속에서 밀려나는 인간의 위상에 대한 우려로서 세기말을 진단하면서, 이는 동시에 21세기의 문학적 위상에 대한 구상과 다름없을 것으로 본다. 진정한 행위란 느리고 어둠같은 침묵이며 둔중한 무게이므로, 이와 같은 인간의 행위는 정보화라는 급속한 회전속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도 하겠지만, 그리고 21세기에는 인문주의가 소멸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인간학의 최후의 보루로서 그 몫을 지켜야 할 것이다. 비록 그 색깔과 형태는 21세기적 형상으로써 그로테스크한 옷매무새에 의해 지배되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진부하고 구태의연할 수도 있는 고전적 • 낭만적 정신의 문학은 견고하게 유지되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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