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반인 현재, 시의 방향성 내지는 경향을 서정화라고 흔히 일컫는다. 시의 서정화란 서정시의 본래적 성격, 즉 개인의 성찰적 내면탐구에 있다는 의미이리라. 이러한 서정성의 경향은 어느 시대에나시장르의 중심이 되어왔음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단지 그 시대의 정치·사회적 성격에 따라서 사회 표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거나, 아니거나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또 달리는 시대의 성격에 따라서 서정성의 분화가 있어왔다. 먼저 이러한 서정성의 분화가 이룩한 시의 장르적 구분으로 현대의 해체적 징후를 점검해 보고자 한다.
비판의 상상력, 현대적 서정
볼프강 카이저는 서정시를 체험서정시와 사상서정시로 나누었다. 체험서정시란 우리 시사에서 소월시가 그 주축이 될 것이고, 사상서정시에는 만해의 시가 적용될 것이다. 즉 개인의 서정이 감성의 세계에 주도된 시는 체험서정시이며, 사상의 세계에 주도된 시는 사상서정시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서정시의 거시분류를 필두로 하여, 우리 현대시에서는 전통 서정시, 지적 서정시, 비판 서정시, 해체 서정시 등이 대두하고 있다. 또 운문의 갈래로서는 서정시와 자유시로 나뉘어지고, 산문으로는 산문시가 있다. 서정시의 전통 · 지적. 비판. 해체의 갈래는 자유시와 산문시의 갈래에도 공히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시장르의 흐름과 갈래는 세계에 대한 개인의 시적 자세로서 명명된다. 개인의 내적 자세를 체득화하여 드러낸 서정시가 시장르의 본래에 해당된다면, 자유시나 산문시는 개인의 서정성을 담보하면서, 시의 율조, 즉 운문과 그 운문의 해체인 산문의 태도로서 이름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시장르에는 헤아릴 수조차 없으리만치 많은 장르명이 등장하고 있다. 가령, 해체시, 풍자시, 비평시, 반시, 전위시, 메타시, 시론시, 시인론시, 도시시, 일상시, 환경시, 자연시(산수시, 여행시, 선시, 국선시), 민중시, 생명시, 생태시, 환경 자연시(「현대시」, 6월호 중에서) 등이 해당한다. 이 뿐만이 아니라, 외국의 장르에서 유래한 사물시, 관념시, 형이상학파시 등, 그리고 1910년대 상징주의와 함께 탄생한 자유시에 대한 명명을 상징시로 칭하기도 하고, 그후 1920년대의 서정시를 낭만시로 칭한 경우도 있다. 또 김춘수의 무의미시, 이승훈의 비대상시 등 시론과 결부된 시장르도 있다. 물론 이러한 장르적 특성이 90년대에 와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러한 시의 특성에 대한 장르명의 다량화가 현재에 와서 만연됐다는 의미이다.
다양해진 시장르명과 현대 시의 해체적 흐름
시장르명의 다량화 역시 이 시대의 해체적 속성을 대변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보고자 한다. 서구의 고전시학에서 유래한 서사시 • 서정시 · 극시의 장르가 현대시학에 이르러서는 서정시 한 분야에서도 이만큼 다양화, 다량화 됐음이다. 즉 상상력의 공간에 따라, 주제에 따라, 그리고 시인의 시적 태도에 따라서 한 편의 서정시에 대해 그 명명을 다양하게 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가령 '자연시'란 자연을 소재 및 주제화 했다는 의미인지. 자연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에 시인의 서정세계를 투여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자연이라는 사물 자체의 본질을 드러냈다는 의미인지 알수가 없다.
이러한 다량의 시장르 속에서도 본래적 서정시의 중심역할은 90년대의 중반인 현재를 풍미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을 비인간중심의 현대에서 휴머니즘의 르네상스를 꾀하고자 한 의도로 보고싶다. 서정시들 간의 시적 차이라면, 시와 시인에 따른 상상력의 공간으로 가름할 수 있겠다. 상상력의 공간이란 시인의 서정적 내면을 드러내기 위한 '사물. 공간 • 시간의 질료가 적용된다. 그 상상력의 공간에 따라서 체험의 상상력과 비판의 상상력으로 크게 이분해 본다. 체험의 상상력이란 개인의 과거체험. 현재체험 등. 주로 개인적 세계에 해당하고, 비판의 상상력이란 개인 외적 세계, 즉 타인의 삶, 사회공간, 역사공간 등이 해당한다. 체험의 상상력을 통해서는 시인의 존재론적 성찰에 따른 비감을 감지할 수 있으며, 비판의 상상력을 통해서는 세계와의 비평적 정신을 감지할 수 있다. 나아가 개인의 과거·현재체험이 타자적 삶, 즉 사회구조와 동일성을 보여주는 비극적 비판서정이 세번째 항으로 존재한다. 또 과거 중에서도 개인의 과거체험이 아니라. 역사·문화적 과거공간을 현재화 한 패러디적 서정의 세계들이 특히 이달의 시를 채색하고 있다.
체험의 상상력과 그 서정
현대적 체험의 서정은 전통 혹은 고전적 체험서정을 빗겨간 일탈의 어조와 일탈의 병치은유에서 현대적 상상력의 구조가 축조된다. 비극의 정조가 외연으로 흘러내리지 않고, 언어내포와 문맥속에 감추어져 가면을 쓰고 있다. 다음 송재학의 <일출>은 짧지만 자연의 가면을 쓴채, 이를 잘 담고 있다.
원래 그 빛덩어리는 죽기 위해 바다에 갔던 내 여자의 눈빛이 다 한 번 도려낸 곳의 살은 아물어도 흉터는 언제나 스멀거린다바다는 그녀가 떠날 세라 달마저 가리면서 파도를 정지시킨다 두렵구나, 지금 밤낮의 언저리에서 약속된 저 슬픔은 무어냐 그녀의 자궁은 시리도록 투명하다 부푼 돛을 앞세운 범선이로 향한다 나뭇잎 닮은 물소리가 차츰 눈부시다.
송재학, <일출>
빛덩어리=내 여자의 눈빛=바다의 흉터=나의(혹은 바다의) 슬픔=약속된 슬픔=적도로 향하는 범선=도망간 여자 등, 비유사성의 사물들이 시인의 은유의 상상력에 의해서 일치를 이룬다. 일출하는 바알간햇덩어리를 내 여자의 눈빛이라고 한 것이 특히 일미이다. 일출의 바다는 그녀를, 즉 바알간 햇덩어리를 품고 싶어 숨소리(파도)조차 정지하고 있다. 그러나 햇덩어리가 빠져나갈 일출의 순간, 즉 밤낮의 언저리는 슬픔의 순간으로 전이된다. 연인과 헤어질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자궁, 즉 햇덩어리가 빠져나갈 찰나의 바다는 붉다 못해 시리도록 투명하다. 그 시리도록 투명한 빛은 연인 간의 이별의 아픔을 대신한다.
햇덩어리가 바다에서 하늘로 자리를 바꾼 뒤에도, 바다는 여전히 눈부실 것이다. 태양이 하늘에서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기에! 이때 두 남자인 바다와 하늘은 햇덩어리인 여자를 중심으로 삼각관계에 있다. 그러나 화자인 바다는 그 여자가 일몰에 또 다시 돌아올 것을 알기에 일출을 '약속된 슬픔'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잃어버린 빛인 도망간 여자가 돌아올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제 눈이 없어졌다' 하며, 바다가 빛을 잃었다고 한다. 빛을 잃은 시간은 일출과 일몰의 사이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연인에게는,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영원같은 사이일 것이다. 바다가 햇덩어리를 토해내는 일출의 자연현상을 통해서 사랑하는 두 사람이 헤어지는 슬픔과 상처를 묘사하였으나, 동시에 돌아올 것을 신뢰하는 의식을 보여준다. 현재는 제 눈이 없어진 슬픈 상황이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바다는 남성으로 햇덩어리는 여성으로 은유된 이 시는 바다는 여성이요 하늘은 남성이라는 일반적 상징성에서 일탈하여 개인상징을 창조하였으며, 남녀의 사랑이라는 진부할 수 있는 주제를 일출의 가면속에서 신선하게 감각화하였다. 소월의 감성적 '진달래 애한'이 송재학의 <일출>에서는 '존재론적 애한'의 현대적 서정으로 변모되었다. 현대적 체험의 상상력과 서정이 잘 융합된 것이다. 남성의 존재성은 여성이 존재함으로 비로소 그 빛이 있다는 사실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물론 이 반대 양상 또한 성립된다. 그러나 그 빛은 찰나의 만남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이 잊혀지고 있는 이 시대에 참다운 만남, 즉 사랑에 의한 휴머니즘 구현의 한 차원을 송재학은 감각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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