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발끝에서 시작된 작은 접촉이 대지로 스며들고, 나무와 꽃과 안개를 지나 허공에 닿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틈과 사이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조용히 호흡하며 존재를 드러낸다. 그 사이는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리듬이 흐르고, 생명들이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자리다. 오규원의 시는 그런 사이들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과 관계의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짚어낸다.
오규원 시 오늘과 아침
땅의 표면과 공기 사이 공기와 내 구두의 바닥 사이 내 구두의 바닥과 발바닥 사이 발바닥과 근육 사이 근육과 뼈 사이 뼈와 발등 사이 발등과 발등을 덮고 있는 바랭이 사이 그리고 바랭이와 공기 사이
땅과 제일 먼저 태어난 채송화의 잎 사이 제일 먼저 태어난 잎과 그 다음 나온 잎 사이 제일 어린 잎과 안개 사이 그리고 한 자쯤 높이의 흐린 안개와 수국 사이 수국과 수국 곁에 엉긴 모란 사이 모란의 잎과 모란의 꽃 사이 모란의 꽃과 안개 사이
덜자란 잔디와 웃자란 잔디 사이 웃자란 잔디와 명아주 사이명아주와 붓꽃 사이 붓꽃과 남천 사이 남천과 배롱나무 사이 배롱나무와 마가목 사이 마가목과 자귀나무 사이 자귀나무와 안개 사이 그 안개와 허공 사이
오늘과
아침
오규원, <오늘과 아침> 전문
틈새의 미학과 자연 속 자아의 현존성
가을호의 문예지들에 실린 오규원의 시를 보면서, '연애를 할 때만 연애시를 쓴다'는 괴테의 말이 생각났다. 그 시들은 전원에 몸담고 있는 오규원의 근황을 대변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집 「사랑의 감옥(문학과 지성사, 1991)에서 그는 자본주의의 물신화에 휩싸여 폐허화되어가는 도시의 삶을 성찰하는 시세계를 보여주었으나, 지금 그가 머물고 있는 공간은 도시가 아니기에 그는 도시의 시가 아니라, 전원의 시를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규원의 시를 자연친화력에 토대한 자연시 및 전원시라고 할 수는 없다. 자못 식물도감을 연상케하는 <오늘과 아침>에서 우주의 신비, 또는 생명의 소리에 대한, 이제는 낮설어지기까지 한 기쁨을 만나게 되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자연과 존재에 대한 그의 탐구인식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물 및 자연은 그의 내면풍경 표출을 위한 바꿔진 대상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나'를 말하게 된다.
자연에 토대한 서정시가 자연의 아름다움 및 넉넉함에 기대인 생명력을 지향한다면, 오규원의 시에는 '자연의 공간'과 '자연의 시간' 위에 머물고 있는 자아의 현존성에 대한 인식이 내밀화되어 있다. 그래서 그가 머물고 있는 공간이 바뀜에 따라 시적 대상이 바뀌게 된 것이고, 그에 따른 상황과 존재에 대한 인식이 달리 나타난다.
즉 '사랑의 감옥에서 피폐해진 도시의 삶을 지적했다면, 최근에는 자연 속에서의 눈을 통해 '자연. 나. 지금'의 존재성을 간파하고 있다. 그는 자연의 삶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바라보고 자연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가장 주요한 지시어, 즉 기조어는 <과>라고 하겠는데, <과>는 <과>이면서, 동시에 〈그리고〉이고, 또 <사이>이기도 하다. <과>는 사물과 사물을 연결해주는 연결사의 기능을 하면서, 사물과 사물 사이에 놓여있는 간격 및 거리에 대한 지시어이기도 하고, 또 사물과 사물 사이의 여백 및 여유의 미학을 담아내는 기능을 한다. 그것은 사물들을 하나되게도 하며, 분리시키기도 하여, 차이와 통합의 역할로서 <틈새>의 미학을 산출한다.
발과 대지, 문명과 자연의 이중적 서사
에릭 프롬이 철학적 단상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는 <과(and)>가 있다'는 말로 단상의 서두를 장식했듯이, 모든 존재물의 각각은 <과〉에 의해서 독자적으로도, 동시에 연계적으로도 존재함을 드러내게 된다. 하늘에 대한 대립물로서 땅의 특성을, 동시에 하늘의 특성을 우리는 <과>에 의해서 확연히 파악하게 된다는 말이다. 즉 <과〉는 하늘과 땅을 연계지으며, 또 그 사이에는 경계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오규원의 시에서 사물이 언어에 의해서 그 존재성을 보다 분명히 인간에게 인식시켜 준다는 현대언어철학의 단편을 엿봄과 동시에 사물 및 자연과 분리된 현대인의 현존성 및 그에 따른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 현존성은 물론 직서화되지는 않았지만, 이 시대에 낯설어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먼저 첫째 연에서는 '땅'과 '나의 발'에서 부터 사물 배열의 순차를 시작하고 있는데, 시인의 시선이 대지에 멈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땅과 인간의 발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인간에게 부여된 땅의 존재성은 발이 있기에 비로소 그 실제적 의미가 가능하다. 발이 모성적인 땅과 접하고 있다는 점에서, 땅의 풍요한 힘이 발을 통하여 인간의 육체에 들어온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리스 로마문명시대에도 이미 있었으며, 이외에 대지와 일체가 됐던 원시인들의 생활방식에서도 보다 더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에서 발의 메타포는 머리의 그것에 대립되어 마이너스 부분의 메타포로서 혹사되고 있다. 즉 '상/하 = 상반신/하반신= 머리/발= 정신/신체'와 같은 범주간의 대립에서 발은 하위 가치태로 자리한다. 하반신은 인체의 비이성적인 부분의 담당자이며, 나체 그 자체처럼 접촉할 수 없는 계급의 취급을 받고 있다.
상반신이 신체 속의 정신적 측면, 즉 문화를 담당하고 있다면, 하반신은 감각적 측면, 즉 자연 부분의 메타포를 의미한다. 인간이 부여한 가치성이 비록 하위일지라도 감각과 자연의 상징으로서 발은 이성 및 정신의 층위에 앞선다. 발 · 밑바닥. 어둠의 세계. 아래의 세계로서 자연은 빛의 세계의 본질이며, 빛의 세계를 잉태하는 모태이므로, 발은 인간을 자연과 매개하여 인간의 자연적 본질을 인식케하는 신체의 지주인 것이다. 비록 발이 의미론적으로는 이의적(二的)인 지위에 있긴 하지만, 존재론적으로는 일의적이란 말이다. 첫째 연에서 땅과 공기를 제외하면, '구두, 발바닥, 근육, 뼈, 발등, 바랭이' 등은 신체를 지시하는데, 구두가 없었던 시절의 인간은 발바닥이 구두의 역할을 대신했었고, 의복이 불필요했던 시절의 인간은 피부가 그 역할을 대신했었다. 구두를 비롯한 의복이 부재하고 불필요했던 시절의 원시인들은 피부와 대지와의 직접적 접촉에서 보다 더 대지의 신적인 힘을 닮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규원은 <오늘>의 상황에서 대지와의 나체적 접촉이 아니라, 대지와 <사이> 및 <거리>를 두고 있는 문명인의 초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인간과 자연의 분리의 세계, 그러나 또 일체라는 이중구조는 다음 연에서는 인간을 제외시키고 자연물 그 자체의 어우러짐과 그 안의 차이를 보여준다.
생명과 질서와 <사이>의 미학
둘째 연에서 땅과 채송화, 수국, 모란, 그리고 잎과 꽃 및 안개를 두고, 이제 인간이 떠난 자연의 생태를 관찰하여 생명의 구조학을 그리고 있다. 땅에서 태어난 채송화, 그 채송화의 제일 먼저 태어난 잎과 그 다음 나온 잎 사이, 또 그 어린 잎과 안개 사이 등에서 시인은 생명성장의 순서를 상상하고 있으며, 삶의 순차적 질서를 상상하고 있다. '모란의 잎과 모란의 꽃 사이'에서는 잎이 나오고 꽃이 피는, 또는 목련처럼 식물에 따라서는 꽃이 피고 잎이 나오는 성장의 질서, 또는 성장의 순서에서 오는 차이를 <사이>의 미학으로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질서를 보이게 하는 시적 상상력이 지닌 창조의 힘에 바탕하고 있다. 첫째 연에서 시인의 시선은 땅을 향하고 발을 향했기에 고개숙인 탐구자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제 두째 연에서 시인은 '한 자쯤 높이의 흐린 안개'를 마주할 만큼 고개를 세우고 있으나, 여전히 그의 고개는 구부린 채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자세에서야 채송화를 볼 수 있고, 수국을, 모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안개의 힘과 허공의 시학
세째 연에서 시인의 시선은 비로소 허공을 응시할 수 있는 높이에 이르렀다. 안개 덮힌 대기를 뚫고 시인의 시선이 머물 수 있는 허공의 높이는 어디쯤일까. 그런데 안개 덮힌 대기에서도 허공이 보이나 모르겠다. 안개의 미망은 허공 조차도 삼켜버릴텐데 말이다. 결국 시인은 안개와 허공 사이의 <사이> 없음을 말하기 위해 <사이>라고 애써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은 또 안개에 의해 땅과 하늘의 구별이 무마됨을 의도한 언술이기도 할 것이고, 안개는 하늘 조차도 땅에 와 닿게 하는 포용의 힘을 지녔음을 의도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 힘은 빛의 세계가 따라올 수 없는 어둠의 세계, 혼돈의 세계가 지닌 힘이다. 결국 시인은 '안개 덮힌 오늘 아침의 흐름'을 말하기 위하여, 즉 여명의 출발과 그 흐름의 미세한 변화를 말하기 위하여 땅과 식물과 허공을 등장시켰으며, 눈높이의 위치를 바꿔갔던 것이다.
오늘과 아침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오늘과/아침' 이라고 하여 <오늘>과 <아침>을 구분하고 있는데, 그러나 '오늘과 아침'은 '오늘의 아침'에 대한 다른 지칭임을 전체 시의 흐름에서 파악하였다. 물론 '오늘 아침'에서 <과>는 '과의 시학'을 드러내기 위한, 즉 <차이>와 <사이>의 미학을 드러내기 위한 구분인 것이다. 만약 '오늘과/아침'을 '오늘/과/아침'으로 행구분을 하면 어떠할까 상상해 본다. 이는 <과>에 부과된 의도가 너무 표면화되어서 나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오늘/아침'이라고 하면 어떠할까. 땅에서 고개들어 안개에 덮힌 허공을 보면서, 이제 시인은 지상을 탈출하고 있다.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을 탈출하여 시인이 서있는 위치로 돌아온다. 이때 사물들은 시인을 빠져나가 제 위치로 돌아가고 시인과 멀어진다. 존재물 간의 가시적 구분이 이루어지는 시각이다. 그래서 시도 시인을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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