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당선작들은 매년 새로운 목소리와 시적 실험을 통해 시대의 감각을 담아낸다. 올해의 당선작들 역시 자의식의 깊은 탐구와 생명의 은유적 표현으로 각자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자의식 중심의 내면적 시선부터 자연과 생명, 그리고 관계의 아이러니를 포착한 작품들까지, 이들의 시도는 전통과 새로움의 경계에서 고유한 흔적을 남긴다. 중세의 가을 4에서 드러난 심리적 흐름, 부의에서 엿보이는 상실의 치환, 그리고 오월과 퓨즈가 나간 숲이 그리는 희망과 현실의 긴장감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삶과 죽음, 그리고 존재의 본질을 묻는다. 이러한 다양한 감각과 주제는 오늘날 시문학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암시하며 독자들에게 풍부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자의식 중심의 세계
사실은 우리 모두 貴族이고 싶었다.
토익TOIEC 점수로만 나를 계산 할 수 있었던,
대학시절, 人間임을 기억하고 싶었으나 말을 할 수 없었고
편지쓰기를 좋아했다. 겨울철이 와도 거리엔 영정을 든
女人들이 추엽처럼 아스팔트를 떠돌았다.
사진을 보면 千年을 썩지 않을 눈망울들.
누이가 사 준 볼펜을 잃어버려 더더욱 어쩔줄 모르겠던 한 해가
초상집 잉걸불 연기처럼 사라진다.
노만수, <中世의 가을 4> 일부
당선작들 중에서 가장 자의식 중심의 세계를 보여주는 이 시는 제목부터 <중세의 가을>이라는 자아중심적 제목이어서, 그러면 '중세의 겨울'은 어떠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다른 작품들이 제목을 향하여 직접적 거리로서 시 구성을 보였다면, 이 시는 지극히 먼 길, 즉 다양한 상상력의 공간을 통해서 자의식 중심구조를 보이고 있다. 자의식구조 중에서도 심리적 흐름이 주류를 이루는데, 특히 '나의 이야기. 나의 의식' 세계에 의한 자아중심의 자세는 시인으로의 출발선에서 보일 수 있는 가장 정통적 길이기도 하다. 그 정통의 길에서 심리적 의식을 투여한 실험적 구성이 신인으로의 새로움을 보여주나, 실험정신은 체험적 깊이에서 비롯됐을 때 감동의 깊이를 담지할 것이기 때문에, 실험을 위한 실험으로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또 세상을 의식한 시쓰기 보다는 세상의 모순이 나의 모순이라는 일체감에서 비롯되는 시쓰기를 할 때, 생경한 언어들은 사라지고 감동의 언어들이 나타날 것이다.
가령 '겨울철이 와도 거리엔 영정을 든 女人들이 秋葉처럼 아스팔트를 떠돌았다'나 '누이가 사 준 볼펜을 잃어버려 더더욱 어쩔줄 모르겠던 한 해가' 등의 표현은 누이라는 여인의 아픔이 화자의 아픔과 겹쳐져서 시적 효과를 발하고 있으나, '사진을 보면 千年을 썩지 않을 눈망울들' 이란 어구는 진부하다. 왜 천년까지만 썩지않아야 하는가? 또 하나 이것은 의도적 오류인지, 인쇄상 오류인지는 모르겠지만 'TOEIC'이 'TOIEC'으로 되어있다. 확인할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관념이 이입된 자연물을 통해 생명 지향
할머님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갔다
영정앞에 늘 갖고 계시던 호두알이 반짝이며
입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봉투를 가만히 올려 놓았다.
최영규, <부의(賻儀)> 일부
<부의> <오월><퓨즈가 나간 숲> 등, 세편의 시는 <안개의 도시>나<운천리 길>이 지녔던 구체적 자연공간에 의한 삶의 형상화가 아니라, 관념이 이입된 자연물을 통하여 생명 지향을 상징하고 있다. 시인의 체험적 공간을 시로 형상화할 경우에 시의 분위기가 자연스러운 감동을 자아낸다면, 생명지향을 의도하여 자연물이나 자연현상에 상징적으로 융합시킬 경우, 그 시에는 창작을 위한, 또는 지향성을 의도한 시인의 인위적 자세가 배어난다. 의도된 인위적 자세에 의한 시는 단아한 구성과 잘 다듬어진 언어미를 분출하기도 하지만, 자연예찬에 편향되어 자연에 대한 관습적 언어들이 주류를 이루는 상투성에 빠지기 쉽다. 상투성이란 역사의 시간량에 비례하여 길들여진 성향이기 때문에, 특히 우리의 시문학사에서 의인법에 의한 자연친화는 가장 많이 애용돼 온 결과, 현재에 빌어온 자연친화는 자칫 관습화된 언어에 의한 구태의연함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새로움이 아니라 답습의 가능성을 우려한다. 최영규의 <부의>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나타나는데, 가령 '씨앗들은 자신보다 백배나 큰 꽃들을/여름내 계속 피워낸다 그리고 그 많은 꽃들은 다시/반짝이는 껍질의 씨앗 속으로 숨어들고/또다시 꽃피우고 씨앗으로 돌아오고' 등의 시구에서 새로운 사실, 새로운 묘사력을 찾을 수 없다. 생태계의 파괴를 우려하는 시들이 문명비판의 시와 함께 오랜 문학사적 자취를 엮어온 이 시점에서 '씨앗, 꽃' 등을 상상력의 대상으로 취한 점이 새로울 것은 없지만, 신인의 출발로서, 그리고 생명의 가장 본질적인 것에 대한 재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장점일 수 있다.
더불어 '할머니'의 은유로서 '영정, 입다문 꽃씨', 제유로서 '호두알=입다문 꽃씨'에 의한 치환의 등식이 이 시의 새로운 인식구조로 보인다. 꽃씨에 내포된 생과 사의 순환원리를 규명해 냄도 중요하지만, 이는 새로운 사실일 수 없듯이, 할머니 마실 다니시라고 화자가 다듬었던 길이 그 할머니 문상가는 화자의 길로 바뀐 아이러니 구조에 '부의'의 진정한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할머님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드린 뒷길로/문상을 갔다' 라는 한 마디를 위하여 다른 어휘들은 존재하고 있음이다.
신뢰의 자세를 보여주는 시
바람이 지날 때마다 눈이 부시다 잎이 넓은 나무들 세상의 그늘을 가려주지 못하고 나지막이 엎드린 가난 위에서도 반짝거리는 나뭇잎 착한 이웃들의 웃음처럼 환한 잇몸을 드러내며 햇살이 쏟아진다 사람의 흔적이 자목련 향기처럼 아름답다 숲을 떠난 꽃씨들이 큰 길까지 날리고 나른한 향수에 풀린 마을을 내다본다 골목길을 따라 풍선마냥 가벼운 마음들이 들락거린다 자주 꺾이는 바람도 세상살이가 조금씩 눈에 보일 쯤이면 바로 펼 수 있을까 마주치는 세상의 모퉁이마다 큰바퀴가 지나고 마른 돌가루가 날릴지라도 손바닥을 펴서 햇살을 받는다 사는 날까진 기다릴 것이 남아 있는가 오랜 희망을 다시 짚어보듯 푸른 소리를 실어나르는 송전탑을 향해 귀를 세운다.
고창환, <오월> 전문
고창환의 <오월>에서 '꽃씨'는 최영규의 봉투에 담긴 씨앗과는 달리, 집을 떠나 바람타고 낯선 공간으로 확산되는 생명체이다. 죽음과 생명의 실체로서 씨앗이 아니라, 출생지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행동반경을 넓혀가는 개척자적 정신으로서 생명체이다. 개척자적 정신으로 쏠리는 자세를 '숲을 떠난 꽃씨들이 큰 길까지 날리고 나른한 향수에 풀린 마을을 내다본다' 라는 시구에서 보여준다. 이와 같은 행진적 일방통행을 견제하는 자세를 '자주 꺾이는 바람도 세상살이가 조금씩 눈에 보일 쯤이면 바로 펼 수 있을까' 라고 잠시 제시하고 있으나, 시의 전체적 흐름은 희망신뢰, 미래신뢰, 즉 삶의 신뢰의 자세로 나타난다.
비록 그 신뢰가 의도적 강조일지라도. 이와 같은 자세는 어두운 현실에 대응한 밝고 건강한 접근이라는 점에서 분명 미덕에 해당하지만, 시적 갈등, 또는 긴장을 통한 현실에 대한 고뇌의 담론이 부족하기 때문에 단조로운 인식구조라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무릇 장점이 곧 단점이 된다는 관형어가 있지만, 건강성 지향을 위한 확고한 자세가 다른 쪽의 비건강한 구체성을 놓쳐버릴 단점이 내포되어 있다.
삶은 장점만으로도, 그리고 단점만으로도 점철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양자의 상호 견제의 작용과 그에 대한 탐구의 시각이 겹쳐질 때 시가 주는 감동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물론 '큰바퀴가 지나고 마른 돌가루가 날릴지라도'에서 역사현실에 대한 구체성을 담고있긴 하지만, 시의 전체적인 기류는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에 그 제시가 약하다.
또 '마른 돌가루'는 동일의미의 반복사용으로 참신한 언어조탁미를 잃고 있다. 젖은 가루가 날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더불어 신춘문예의 다른 당선작들이 겨울과 죽음의 시간을 노래했다면, 고창환은 오월과 생명의 시간을 노래한 점으로 특징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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