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에 지름길이란 있을 수 없다. 시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인간이 스스로를 표현함에 있어 그 누구와도 다른 독립된 '나'를 발견하자 함이고, 그 나를 완성시켜 나가는 특별한 발전적 단계이기 때문이다.
'나'란 누구인가. 인간이라 하여 누구나 '나'를 깨닫고, 나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사회에 적응하는 사회적인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나'는 사회에 적응하기보다는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사회 안의 나를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차별화시키는 반사회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예술가의 갈등과 예술의 모순점은 실로 여기에 있다.
나는 과연 시를 쓸 수 있는가
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예술 본연의 목적과 예술을 성립시키기 위한 예술가의 방법론이 상치될 수 있는 위험성이 요소요소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타고난 재능, 꾸준한 습작, 훌륭한 작품의 감상은 창작실기의 3대 요소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창작 과정에서는 이상적인 논리에 불과할 때가 많다.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우선 창작의 욕구가 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인가 남을 위한 것인가 스스로에게 따져 물어야 한다.
타고난 재능이란,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며 그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보조수단으로서 남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제 아래 꾸준한 습작과 훌륭한 작품의 감상이 허용된다.
예술에의 원론적인 깨우침을 갖지 못할 때는 창작과정에서 성취감을 얻기보다는 심신만 피곤해지기 일쑤이다.
그러나 예술 원론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쓰고 싶은 사람에게 예술에 대한 공부부터 강요한다는 것은 사실 원칙론이나 이상론에 불과하다.
작품이 빠져버린 이론은 작품의 창작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아가 훌륭한 작품의 훌륭함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예술이론과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초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이 갈등의 해소점은 없는가. 작품을 써나가면서 그에 합당한 이론을 한 단계씩 밟아오를 수는 없는가. 무엇인가 쓰고 싶은 사람에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그와 같이 무작정 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기획되고 집필된 것이다.
창작실기의 3대 요소
그렇다면 이제 창작실기의 3대 요소부터 이야기해 나가기로 하자. 초심자의 경우 제일 먼저 궁금해 하는 것이 자신에게 과연 쓸 수 있는 재능이 있느냐는 단순한 조바심이다. 허나 누가 그의 재능을 첫눈에 섣불리 단언할 수 있으랴. 세계의 문학사는 조숙한 천재들과 함께 늦깎이 문인들을 다같이 불멸의 성좌에 올려놓고 있다. 처음에 빠른 사람이 있고 나중에 빛을 보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남과 똑같은 과정을 겪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재능이라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느냐 없느냐는 처음의 문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시와 같은 문자예술에서는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 우선 써보는 것이 첫걸음이다.
작품을 만들기 위해 시험삼아 써보는 것을 습작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습작은 지속적인 반복훈련에 따라 향상될 수 있다. 습작을 함에 따라 표현이 다듬어지고, 그러한 훈련을 위해 다른 사람의 좋은 작품을 참고해야 한다. 지적이고 감성적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의 습작시기를 거치면 초보적인 작품을 생산할 수 있고, 이때부터는 훌륭한 작품을 찾아 읽을 수 있는 눈매가 서게 된다. 무엇인가 써 보았을 때부터 초보적인 작품을 쓰게 되기까지에는 또 얼마나 시일이 걸리느냐가 초심자의 두번째 관심사이지만 여기서도 명쾌한 답을 드릴 수가 없다. 개인차가 많기 때문이다.
허나 이 경우. 필자의 습작경험과 시작지도 경험을 예로 들 수는 있다.
필자의 경우는 처음 시를 썼을 때부터 초보적인 작품이 나오기까지 1년여가 걸렸다고 기억된다. 또 개별적으로 작품지도를 하였을 때도 6개월에서 1년여 정도면 작품의 형태를 갖추는 것이 보통이었다.
초보적인 작품의 형태를 갖추고 나면 초심자들의 발전 속도는 개인차가 더욱 분명해진다. 특히 습작과 감상을 병행하는 사람들의 발전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진다. 스스로의 힘으로 훌륭한 작품을 감별할 수 있을 때 그 작품과 스스로의 작품을 비교할 수 있게 된다. 그 비교 관점에서 스스로의 수준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스스로의 취약점을 고쳐나가는 힘이 붙으므로 작품의 발전도 가속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훌륭한 작품을 감상한다지만 예술가의 명성이 개개의 작품에 걸맞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독자의 수준이 너무 낮아 그 작품의 진수를 감상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이때문에 필자는 감상작품을 선택할 때는 시인의 이름에 구애받지 말고 스스로의 판단에 의존할 것을 권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 좋은 작품을 골라나가라는 것이다.
결론하자면, 나는 과연 시를 쓸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빠지기보다는, 우선 쓰고, 읽고, 생각하는 행위에 돌입하라고 권할 수밖에 없다. 허나 무조건 쓰고 읽고 생각하는 일이란 얼마나 피곤한 시간의 낭비인가. 이 때문에 필자는 초보자를 위한 창작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실제에 적용해 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상대로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얼마나 써야 하는가
창작 훈련에 가장 능률적인 방법은 우선 많이 쓰는 것이다. 필자는 대부분의 초보자에게 3백편 이상의 시를 창작하기를 권하고 있다. 물론 3백편 운운의 숫자는 막연한 추정이 아닐 수 없다. 허나 사흘에 한 편 정도씩 작품에 몰두할 수 있다면 1년에 1백편꼴이 되므로 3백편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적어도 3년여의 시간이 요청된다. 예술에의 몰입을 위해서는 최소한 이 정도의 긴장과 열성을 갖는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작품의 습작이 1백편을 넘어갈 때부터는 가속도가 붙게 마련이다. 이때부터는 작품의 우열은 어쨌든 하나의 모양을 갖추게 된다.
또한 이 시인에게는 두가지 이득이 생긴다. 시란 어떤 것이라는 스스로의 느낌이 어느 정도 구체화될 것이고, 그러는 동안 작품을 쓰기 전부터 노상 생각하고 있던 막연한 외로움이나 그리움과 같은 기초적인 감정이 정화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이 세상을 산다는 데 대해 외로움과 무서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기초감정은 극히 공통적인 것이기에 예술적 표현으로 승화시키려면 고도의 기교와 능력을 가져야만 성취될 수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물을 그려내면 그 사물에 대해 누구나 비평가가 될 수 있고, 따라서 약점도 발견해내기가 쉽다.
헌데 예술은 사물을 복사해 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눈으로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기초적인 감정표현은 금물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기초적인 감정이 마음에 남아 있는 한, 언제든 머리를 불쑥불쑥 내밀 가능성이 많은 법인즉 차라리 초보단계에서 배설을 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
또한 시 창작과 병행해 일기나 편지나 수필을 가능한 대로 많이 써보아야만 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초심자의 가장 큰 오해는. 시는 시적으로 쓰는 것이며, 시는 산문과 달라 구조가 없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 얼마나 큰 오해인가. 모든 글은 그 구성을 위한 몇 가지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구조를 빨리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아무래도 산문 쪽이 편하다. 산문에서는 구조가 겉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역으로 시에서는 구조가 감추어져 있다는 뜻이 된다.
그때문에 시는 시적으로 쓰는 것이라는 오해를 갖게 된다. 시적인 것은 시가 아니다. 시는 시일 뿐이다. 남의 시는 또한 나의 시가 아니다. 나만이 쓸 수 있는 내용이 곧 내가 쓰고 싶은 내용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서 매편의 작품을 써나가야 한다. 습작품이 1백편을 넘고부터는 대부분이 전문적인 시인의 길에 오르게 된다. 시가 어떤 것이라는 형식을 이해하는 동시에 시에 무엇을 쓰는 것이라는 내용에 대한 자각이 굳어지기 때문이다. 시를 어떻게 무엇을 쓰느냐는 자각은 시창작에 있어 모든 형식 · 문체 · 낱말 · 부호 등을 활용해 보자는 기교적인 문제와 연결될 경우 보다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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