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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언어로 표현되는 예술이다

by 토끼투끼 2024. 11. 2.

시는 언어로 표현되는 예술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시인은 모국어로 시를 쓴다. 한자시대에 한국인이 중국의 한자로 시를 쓴 경우도 있고, 릴케와 같은 일부 시인의 경우 모국어인 독일어로 시를 쓰면서도 프랑스어의 시편을 남기고 있지만, 이런 경우는 특수한 문화적 상황의 소산일 뿐이다. 이때문에 필자는 초보자의 경우 시의 단어를 순수한 한국어로 고집하길 권한다. 순수한 한국어라는 말은 외래어를 되도록 배제하라는 뜻이다. 나아가 외국어를 직접 인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 반대 견해를 갖고 있다.

 

시는 언어로 표현되는 예술이다
시는 언어로 표현되는 예술이다

 

 

창작의 첫걸음, 우리말 어휘력 확장하기

모국어에는 우리의 독자적인 지적·감성적 경험이 스며들어 있다. 독자적인 작품을 생산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최상의 재료가 아닐 수 없다. 그 모국어를 젖혀두고, 이국풍의 분위기를 나타내고자 외래어나 외국어를 쓴다는 것은 지적인 허영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필자는 지망생의 첫번째 과제로 한국어 사전을 권한다.

우리나라의 단어는 모두 몇 개나 되는가? 모든 강좌에 있어서 필자가 첫번째로 제기하는 질문이다.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이제까지 그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을 들은 바가 없다.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덮어놓고 책장으로 달려가 국어사전의 항목수를 헤아려 보라. 필자가 참조한 어느 사전은 항목수를 약 31만개로 밝혀놓고 있다. 간행된 사전 중 최대 어휘를 수록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 사전에도 누락된 단어가 적지 않으며, 상당한 전문용어가 제외된 점을 감안하면 우리 어휘는 그 상한선을 40만개에서 50만개로 높여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단어란 그 풀이와 쓰임새가 다양할수록 문화적 발전도를 나타낸다고 한다. 한자어의 경우 20여개의 뜻풀이가 가능하다. 우리 한글은 한자어와 달리그 풀이가 한정적인 단어가 많지만, 그 풀이 하나 하나를 새겨본다면 우리가 창작에 가용할 수 있는 단어는 백만 단어 정도로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시창작에 있어 특수한 전문시어를 고집하는 일은 금물이다. 인간을 매개체로 한 예술행위에 있어 그 대화의 수단인 언어를 최대한 활용하는 일이야말로 절대적인 전제조건이다. 왜 스스로 언어의 폭을 좁힌단 말인가. 그러나 지망생의 경우, 약점이 노출되기 쉬운 비정규어의 사용을 자제하라고 권하겠다. 비어·경음. 격음. 속어·장음. 조어. 부호 등 강한 분위기를 지닌 어휘들은 그만큼 약점의 노출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라.

 

어떻게 시를 감상해야 하는가

시를 감상하기 위해선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허나 대부분의 지망생은 선택할 능력에 미치지 못하므로, 시인이나 친지에게 자문을 하여 시집을 구해 읽는 사례가 많다. 헌데 이 경우 TS 엘리어트의 시집을 권유받고, 몇 번씩 읽어보았으나 전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더라는 식의 푸념을 늘어놓는 사람이 많다. 필자는 그런 자문을 해올 때마다 시인의 명성보다는 스스로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서 골라 읽으라고 권한다. 명성이 높은 시인의 작품일수록 독자의 감상능력이 미처 따르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헌즉 자기 수준에 맞는 작품을 감상함으로써 시의 맛을 속속들이 음미하고 거기서 시읽는 기쁨을 갖는 것이 가장 올바른 감상법이 아니겠는가. 또 하나의 방법은 교과서에 수록된 시를 외어 읽는 것이다.

현재 고교 교과서까지의 교과서에 수록된 우리의 시들은 1백 65편이 된다. 교과서의 시는 물론 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다. 편찬자의 편견으로 인해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도 포함돼 있고, 누락된 대표시인도 있기 때문이다. 또 수록시기에 제한이 있어 근래의 작품을 볼 수 없다는 약점도 있으나 현재의 상황하에서는 그런 대로 긍정적인 면도 많다. 허나 이 작품들을 읽되, 학생들의 시험공부에 필요한 엉뚱한 작품해석 따위를 곁들여 읽을 필요는 없다.

대개의 해석은 작자의 예술적 성취도나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어문법을 따지거나 고정적으로 논리화시킨 것이므로 예술의 본질적인 상상력과 공감을 얻어내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그러나 교과서를 포함해 수준있는 앤솔로지들의 수록작품은 일정한 여과과정을 거쳐 좋은 시의 전형으로 합의된 작품이다. 따라서 시의 내용이나 뜻을 새기기 보다는 통채로 외어 읽음으로써 작품의 진정한 소리에 귀가 트일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좋은 시는 소리내어 읽을 때 그 내용이며 뜻이 절로 가슴에 닿아오고 느껴지게 마련이다.

 

 

시에도 구조가 있다

산문이라고 넓게 불리는 모든 글은 대체로 설명문, 논증문, 묘사문, 서사문의 네 가지로 구분된다. 글쓰는 이의 의도나 목적에 따라 갈래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묘사문은 수필류, 서사문은 소설을 가리키지만 문학작품의 경우에는 작가에 따라 이 모든 글의 장점을 자기 것으로 바꾸어 쓴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 글은 기본적으로 서론, 본론, 결론의 3단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본론과 결론 사이에 또 하나의 마디를 넣으면 4단 구조를 갖게 되고 다시 서론과 본론 사이에 또하나의 마디를 넣으면 5단 구조를 택하게 된다. 흔히 한시에서 말하는 기승전결은 4단 구조를 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에서 많이 쓰이는 것은 4단구조라 할 수 있는데, 이 구조를 익혀놓아야만 자신만의 독특한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풀어 말하면 초심자는 4단구조로서 구조를 익히지만 전문시인의 경우에는 수많은 변형 구조가 가능함은 물론, 매 작품마다 그에 걸맞는 독자적인 구조를 가져야 한다. 시의 구조와 함께 또하나 알아두어야 할 형식은 틀이라는 것이다. 틀은 엄격하게 말해 구조와 같은 뜻이지만 여기서는 시의 성패를 가를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굳이 세분해서 강조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구조를 흐름과 얼개로 나눈다면, 흐름은 진행상의 순서라 할 수 있고, 얼개는 세부적인 연이나 행의 짜맞추기, 시의 제목과 내용이랄 수 있다. 여기서는 얼개의 뜻으로 틀을 쓰고 있다.

모든 시는 기본적인 틀을 갖고 있다. 우리의 정신과 육체가 합해져야 하나의 독자적인 인간이 이루어지듯, 시도 그 내용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다. 그리고 그 그릇은 그 내용물에 따라 재료며 형태를 달리한다. 쉽게 말해 커피잔과 밥그릇이 다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커피잔에 밥을 담아 먹을 수 없는 것이 아니듯 아무렇게나 시를 쓴다 해서 아예 써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기능이나 효율적인 면을 생각하여 보다 적절한 그릇을 택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실 이 문제는 상당히 까다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예술적 숙련도가 높은 전문가에게도 매 작품마다 성공의 기회보다 실패의 함정이 더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대목은 뒷날 전문가가 될 때 유념해야 될 참고사항으로만 시의 내용을 크게 둘로 나누면 추상과 구상으로 간추려진다. 또한 이 두 가지 내용을 섞을 수 있는 방법으로는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시의 틀이라고 갈무리할 수 있다. 이해하길 바란다. 여기서는 우선 초보자를 위한 간단한 틀의 원리를 제시하기로 한다.

① 추상+ 구상

② 구상 + 추상

③ 추상 + 추상

④ 구상+ 구상

이 네 가지 틀은 시의 전면적인 구조에도 적용되지만, 제목과 내용의 관계로 전개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한 행, 또는 한 연의 내부구조에서도 긴밀하게 작동한다. 허나 이 네 가지 틀 중 서로 반대되는 두 개의 틀인 ①과 ②가 그 중에서도 시작훈련에 효과적이다. ③과 ④는 보다 능력을 가질 경우에 비상한 힘을 갖게 된다. 예컨대 '돌은 돌이다'는 ④에 해당되므로 구상 + 구상이지만 평범하기 짝이 없다. 허나 '돌은 마음이다'로 고쳐 쓴다면 ②의 구상 + 추상에 해당되는 바④의 경우보다는 긴장관계가 고조된다. 나아가 ③ ④의 경우에도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다. '돌은 돌이다'가 첫행이라면 마지막 행에 마음은 마음이다'를 대비시키거나, 돌의 내용이지만 제목에 물이라는 추상어를 도입함으로써 돌의 의미를 확대시킬 수가 있다. 더 자세히 풀어 말하자면, 시의 매 행에서 ① ②의 방법을 교직하는 식으로 연과 행, 도입부와 마무리. 내용과 제목을 안배함으로써 좋은 구조를 가질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식의 창작방법은 매우 도식적이고 기계적일 수가 있다. 따라서 언제까지나 이러한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일은 금물이다.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단서가 붙는다. 구조를 이해하고 체득함으로써 비로소 스스로의 구조를 탄생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거듭 말해 하나의 독자적인 개성의 나타남이다. 우리가 훌륭한 시인,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이러한 기본구조를 뛰쳐나가 독자적인 구조를 보여주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허나 생각해 보자. 시의 기본구조조차 연습하지 않고서 어떻게 독자적인 구조를 만들어 내겠는가. 갓 태어난 어린이는 단번에 걷는 것이 아니다. 우선 기고 걸음마를 한 다음에야 보행이 가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