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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고쳐 쓰기

by 토끼투끼 2024. 11. 8.

어쨌든 시를 쓰는 시간이나 장소, 용구 따위에 구애를 받지 않고, 일단 달려들면 끝을 내는 경우가 많으므로, 내게는 거의 초고가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마침 서랍을 정리하다 본즉 헌 노트에 「목도(木島) 」 라는 시의 초고가 남아 있어 소개할까 한다. 한 작품을 여러 번 고쳐 쓴 것이어서, 시작의 실제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 같다.

 

시의 고쳐 쓰기

연작시 달

삼국유사를 주소재로 한 연작시 달은 즈믄 가람에 중의 한 편으로, 연작을 처음 쓸 무렵이라. 내딴에는 무척 공을 들여 다시 고쳐 쓰기를 되풀이한 것이다. 그럴 것이 이제까지와의 시세계와는 전혀 다른 면을 보여주고 싶은 의욕에 휘말려 들었기 때문이다. 「목도」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는데, 신라때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에 관련된 작품이다. 처음에는 연작시의 첫 작품으로 '그 하나'란 제목을 정해놓고 써보았다.

 

그 하나

 

갈대잎을 들여다보면 피처럼 붉은 자죽이 찍혀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朴堤의 핏자죽이라고 전한다

갈대는 포아풀과에 딸린 여러해살이 풀이다

어떤 놈은 3m나 될 정도로 키가 크다

그것들을 골라 발을 만들어 걸면 무심한 달마저 벗이 되고 만다.

드문드문 섞여 있는 붉은 點들도 달빛을 받아 한결 뚜렷해진다.

1000년 전의 朴堤上이 갈대밭 속에서 마음껏 가을을 즐기는 것 같다.

소리쳐 울다가 죽어버린 그의 지어미나 세 딸은 아랑곳 없다.

그러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에 혼자서 가을을 즐긴다.

 

볼모로 왜에 잡혀간 신라 왕자를 도망쳐 보낸 뒤 붙잡혀 처형을 당할 때 박제상은 갈대를 벤 그루터기 위를 맨발로 걷는 형벌을 당했다. 그 때문에 갈대잎에 찍혀 있는 붉은 점을 그의 핏자죽이라고 전한다는 이야기로 시의 첫머리를 삼았으되 갈대는 포아풀과라는 식물학적 분류를 병행하여 서로 다른 이미지의 충격적인 결합을 시도해 본 것이다. 그러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쓰게 되었다. 이번에는 「갈대」라는 제목을 달았다.

 

갈대

갈대잎을 들여다보면 피처럼 붉은 자죽이 드문드문 찍혀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朴堤上의 핏자죽이라고 전한다. 갈대는 포아풀과에 딸린 여러해살이로서 습지에 자라는 데 어떤 놈은 3m나 될 정도로 키가 크다.

朴堤上은 신라 때 사람이고 나라의 목도에서 불에 타 죽었다.

어떻게 해서 관련이 되는지 알 수가 없지만 갈대밭을 치고 무심한 달을 바라보면 점점이 찍힌 붉은 자죽이 달빛을 받아 울음처럼 번쩍이며 흔들린다.

치술령에서 소리쳐 울다가 자진하였다는 그의 지어미나 세 딸의 울음소리가 갈대밭 사이로 우우 지나다니는 것만 같다.

 

박제상이 죽은 목도라는 지명이며, 치술령에서 망부석이 되었다는 그의 지어 미 등 비극적인 사건을 서술로 묘사함으로써 내딴에는 비극적 효과를 고양시키려 하였지만, 작품의 종결을 보았을 때 오히려 반감이 되었다.

 

제목은 「갈대 」로 하고 부제로 '박제상'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그에 대한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기술해 보기로 하되 제목은 「갈대 」로 하고 대신 부제로 '박제상'을 달았다.

 

갈대

갈대잎을 들여다 보면 피처럼 붉은 자죽이 드문드문 찍혀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朴堤上의 핏자죽이라고 전한다. 우리나라 어느 물가에나 숲을 이루어 자라는 갈대는 포아풀과에 딸린 여러해살이 풀인데 어떻게 해서 때의 忠臣인 朴堤上과 관련이 되는지 알길이 없다. 갈대밭을 치고 그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달빛을 바라다보면 갈대밭이 시나브로 흔들릴 적마다 무언가 울음처럼 번쩍이는 것이 있지만 그렇다 해서 치술령에서 소리쳐 울다가 자진하였다는 그의 지어미나 세 딸의 울음소리라 할 수도 없고 朴堤上의 핏자죽이라고 우겨 댈 수는 더욱 없다. 오직 그를 기릴뿐이니 덧없음이여 섬나라의 하늘에 맴돌던 그의 연기 살이타는 그의 냄새만 흘러와 이 하늘에 떠돌고 있음이여 하고 싶은 몇 마디 말이 심중에 남아 이따금 갈대밭이나 찾아다니며 우우 소리칠 뿐인가.

 

그러나 역시 기대했던 바와 전혀 달랐다.

다시 장사라는 제목을 달아 고쳐 썼는데, 이곳은 박제상이 처음 신라를 떠날 때 그의 지어미가 남편의 뒤를 쫓아가다가 더이상 갈 수 없는 바닷가 모래사장으로서 그녀는 여기서 울다가 실신하였다 한다. 치술령보다는 덜 알려진 지명이기에 신선도도 있지만 왜에 가기 전의 '예감'과 같은 것에 호감이 갔기에 택해 보았다.

 

長沙

갈대는 포아풀과에 딸린 여러해살이 풀이다. 키가 큰 놈은 3m가 된다. 그것들을 골라 발을 만들어 걸면 무심한 달마저 벗이된다. 갈대잎을 들여다 보면 피처럼 붉은자죽이 드문드문 찍혀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朴堤의 핏자죽이라고 전한다. 발가죽이 벗겨진 채 갈대 그루터기 위를 걸어갔고 마침내는 木島에서 불에 타죽었던 사내 長沙의 모랫바닥에 주저앉아 길게 부르짖었던 그의 지어도 마침내 소리쳐 울다가 자진하고 말았다 한다. 갈대밭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달빛을 바라다보면 갈대밭이 시나브로 흔들릴 적마다 무언가 울음처럼 번쩍이는 것이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다. 드문드문 섞여 있는 붉은 점들이 달빛을 받아 한결 뚜렷해지더라도 헛된 죽음따위는 아직 헤아리고 싶지 않다.

 

제목 고치기 결과

마침내 거의 생각했던 대로 표현된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장사」라는 제목이 걸린다. 생각했던 만큼의 암시성이 희박한 것 같다. 결국, 그가 죽은 '목도'를 다시 제목으로 삼았다. 발표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갈대는 포아풀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 키가 큰 놈은 3m나 된다. 그것들을 골라 발을 만들어 걸면 무심한 달마저 벗이 된다. 갈대잎을 들여다보면 피처럼 붉은 자죽이 드문드문 찍혀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朴堤의 핏자죽이라고 전한다. 발가죽이 벗겨진 채 갈대 그루터기 위를 걸어갔고 마침내는 木에서 불에 타 죽었던 사내 長의 모랫바닥에 주저 앉아 길게 부르짖었던 그의 지어도 마침내 소리쳐 울다가 자진하고 말았다 한다. 갈대밭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달빛을 바라다보면 갈대밭이 시나브로 흔들릴 적마다 무언가 울음처럼 번쩍이는 것이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다. 드문드문 섞여 있는 붉은 點들이 달빛을 받아 한결 뚜렷해질 때는 피를 보는 것 같아 섬뜩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주 무심한 것만은 아닌 것같아 다시 한번 달을 바라보게 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위의 작품을 보며 발표작 대신에 퇴고 과정 중의 어느 다른 초고를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다시 읽어보아도 역시 발표작 쪽에 기울게 된다. 그것은 나의 시가 숙명적으로 나라는 한 시인의 정신사 전반과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