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선 이미지라든가 테크닉이라든가에 대한 여러 가지 경험과 정보도 필요하겠지만, 외적인 조건 또한 무시할 수 없다는 소리가 있다. 사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러한 것에 큰 영향을 받는다. 언젠가 내 시작에 있어서의 장소라든가 시간 따위에 대한 질문을 받고 쓴 글이 있다. 신인 때의 일이지만 이 책의 성격상 그때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시와 일상의 경계에서 떠오른 영감
나는 영등포 한구석에서 출발해 (신도림동에 살던 때다) 도심지의 어느 출판사에 나가 일을 보고 다시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이 왕복시간은 대개 3시간 정도이다. 이 시간에는 그저 차에 탄 채 하품이나 하는 게 일이지만 그래도 한 시간 정도는 시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무심히 창밖에 지나치는 나무며 차며 사람이며 강물이며 하늘이며 등등의 잡다한 풍경에 눈을 주다보면 어떤 생각이 우러나게 된다. 그러면 그때부터 눈길은 계속 밖에다 준 채 그 생각을 발전시키다 보면 마침내 차에서 내릴 즈음에는 거의 한 편의 시를 이루어낸다.
따라서 하루에 두 편 정도의 시를 매일 쓰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또 있다. 하루 근무 중에 교정지(교정은 출판사의 주요 업무다)를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잠시 행간 사이에서 앞 문장의 꼬리를 내 나름대로 달게 되는 경우가 있다. 연상에 연상을 거듭하다 보면 그것 역시 한 편의 시가 이루어진다. 하루에 한 편 꼴이다.
이 하룻동안에 내가 만나고 이루는 이들 시를 모두 합하면 한 네 편 꼴이 되는 셈이다. 이쯤에서 언젠가 박모는 1년에 시 백 편을 목표로 하는 괴상한 놈이다 하던 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세상에 어떤 넋나간 친구가 기계처럼 일정량을 정해 놓고 시를 쓴다는 말인가.
그런 발상 자체가 순진한 것일 게다.
시 창작의 자유와 기록의 유연성
나는 사실 1년에 백편 정도 발표해 본 적이 한 두 해 정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1년에 서너 편밖에 발표하지 못한 해도 많다. 올해만 해도 이미 10월달인데, 나는 작년 10월부터 써오던 시까지 합쳐서 겨우 20여편. 그나마도 발표는 서너편에 지나지 않는다.
이쯤에서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자.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하루에 네 편 정도의 시를 만나고 이루어 낸다지만, 그것들을 종이에 적어 작품화한 것은 한 번도 없다. 기억력이 나쁘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처음부터 종이에 적어 작품화하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것이 완성되면 1초라도 빨리 그것들을 잊어버린다. 그것들은 다만 내 시가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땅,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흙이므로, 나는 늘 땅을 다지고 흙을 고르는 마음을 지닐 뿐이다.
환경에 얽매이지 않는 시 창작의 비밀
이제 정작 시를 쓸 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사실 내게는 남다른 습관이 없음을 부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나는 용구, 일테면 연필이든 볼펜이든 만년필이든 가리지 않고, 또한 노트장이건 원고지건 포장지 나부랑이건 가리지 않으며, 시간 역시 밤이건 낮이건 가리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옆에 사람이 있건 없건 가리지 않으며, 다방이건 사무실이건 침대건 가리지 않는다. 나를 저지하지 않고 저지할 수 없다는 생각만 들 수 있다면 나는 언제, 어느 곳에서건 시를 쓰게 된다.
그리고 일단 쓰게 되면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에 그것을 끝낸다. 만일 그 사이에 이루어지지 않거나 처음 구절부터 성이 쓰이면 그대로 버리고 만다. 따라서 나는 씌어지는 대로 하루에 두 세 편 쓰기도 하지만 안 씌어지면 1년이든, 혹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잘 씌어졌으므로 아무개의 우스개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런 우스개소리가 오래도록 내 곁을 떠나지 말았으면 한다.
사실 동료 시인들을 보면, 시를 쓰는데 있어서 새벽이거나 한밤중이 아니면 안되거나, 초록색 잉크를 써야만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경우는 특별한 예외에 속할 것 같다. 내가 아는 시인들의 대부분은 그런 기벽을 갖고 있지 않다. 아침이건 점심녘이건, 시를 쓸 수 있는 시간, 써지는 시간이면 그 시간이 시를 쓰기에 가장 알맞는 때다. 빨간색이든 검정색이든 초록색이든 잉크의 색깔같은 것으로 시가 써지고 안 써진다는 말은 그야말로 잘못된 습관에 기인할 뿐이다.
시를 쓰는 환경이나 조건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며, 나는 종종 이러한 생각을 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외적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도 아니고, 어떠한 특별한 의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시는 흘러오는 그 순간에 붙잡으면 될 뿐이다. 무언가를 억지로 찾으려는 순간, 오히려 시는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버린다. 한때는 나 역시 특정한 습관을 가지려 노력한 적이 있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필사를 하거나, 특정 시간에 특정 장소에서 시상을 떠올리려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는 마치 문을 잠그고 다시 열기를 반복하는 행위에 불과했다. 강제로 내 마음을 억누르고, 그 안에서 시를 길어 올리려는 시도는 오히려 내 시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자유롭게 흘러가는 생각과 감정, 그것을 잡아내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생동감 있는 시를 탄생시키는 비밀이었다.
이러한 깨달음 이후로, 나는 주변 환경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누군가와의 대화 중에도, 아니면 어둑한 밤중에 침대에 누워 있을 때에도 시는 나를 찾아왔다. 이따금 시의 한 구절이 떠오를 때는,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 그 자리에서 메모지나 휴대폰을 꺼내 적어 놓는다. 그 구절은 일종의 씨앗과 같다. 나중에 더 큰 시로 자라지 않더라도, 그 순간의 기록은 소중한 자양분이 된다.
그렇기에 시를 쓸 때의 나만의 방법이 필요 없다는 깨달음은, 오히려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잉크 색깔이나 특정한 장소는 단순히 내 마음의 평온을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 그것들이 없다고 해서 시를 쓸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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