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무엇인가. 시는 어떻게 써야 좋은 시가 되는가. 시를 쓰고 고치는 데 왕도는 없는가. 이 끝없는 의문을 풀기 위해서 시가 있고 오늘도 누군가 어디서 시를 쓰고 있는 것이지도 모른다.
시에 대한 정의는 그런 대로 앞장의 「시란 무엇인가」와 뒤의 「시학의 날개에 자세히 밝혀놓았기에 사람에 따라서는 그 중 하나의 명제에 동의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설사 그곳에서 마음에 드는 명제를 찾지 못했다면 시에 대한 정의는 오류의 역사이며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다.
시창작의 여정
시창작 실기라는 또하나의 문제 역시 만만치 않다.
시창작 소프트에서 가능한 대로 시창작 실기에 필요한 것을 망라해 보았지만 그 글만으로 시창작의 문제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로써 문제가 풀린다면 그것은 오히려 시에 대한 모욕이 되리라는 내 생각은 결코 과장이나 비약이 아니다.
시란 바로 그것을 하려는 자의 영혼이다. 그 영혼은 삶을 살고 있으며, 그 삶이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한뼘씩 배밀이를 해나가는 전신포복에 다름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술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시예술만은 꽤나 수월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쓰거나 읽는 데 별다른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또 그런 준비과정에 동의하는 사람 역시 막상 자신이 시를 읽거나 쓸 경우에는 글과 말을 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주 허술하게 덤벼든다.
가령 피아노 레슨이나 회화의 데상 레슨과 견준다면 시공부하는 사람의 수련도가 얼마나 허술한 것인가 비교가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시창작 과정과 실제를 서술하기 위해서는 남에게 이러저러하라는 말을 하기보다 차라리 내 개인적인 체험에 의존하는 것이 쓰기에도 편하고 읽는 이의 입장에서도 효과적이라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감정에서 진리로: 시 창작의 여정과 깨달음
시를 처음 시작할 무렵의 나는 시란 것이 감정의 발산인 것으로만 단순하게 이해했었다. 그래서 나는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내가 외롭고 쓸쓸한 것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란 생각을 충실하게 종이에 옮겨놓았다. 그리고 그 행위는 한동안 나를 기쁘게 하고 들뜨게 했다. 쓰고 나면 막혔던 가슴이 뚫린 듯 후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자 그립다거나 외롭다거나 하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을 그대로 문자화시키고서 한 편의 시를 썼다고 우쭐거리는 것도 시들해졌다. 가장 큰 이유는 밤낮 같은 소리를 쓴다는 것이었다.
어쩌다 조금 다르게(제대로 고백하자면 멋지게) 표현하고 다시 우쭐거릴 때도 있지만 그 기쁜 시간이 불과 한두 시간만 지나면 약효가 떨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립다' 고 내 자신이 선명히 써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냉정해진 나는 그 말이 한두 시간 전에 내 자신이 써놓은 그 말인 것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와 같이 지리하고 짜증나는 되풀이를 거치는 동안,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는 시차에 약간씩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한두 시간에서 서너 시간이윽고 어떤 때는 사나흘쯤 뒤에 가서나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게끔 사뭇 뻔뻔해졌다.
뿐만 아니라 시는 그립다를 그립다라고 쓰는 것이 아니라 안그립다고 써야 그리운 것이라는 역의 논리도 개발하여 스스로를 다구치고, 휘두르게끔 되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정의는 최초의 정의보다 약간은 근사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다만 생각하는 시간도 웬만큼 길어졌고 시구를 다듬는 시간도 늘어난 때문인데, 그 무렵의 나는 역의 논리로 하여 한결 더 시 같아진 것으로만 착각을 한 것이다.
이윽고 나는 자신의 착각을 깨닫게 되었다. 시란 무엇이냐는 끊임없는 반문 또한 이 무렵에 비로소 시작된 것인데, 그러한 질의와 답의 반복적인 훈련은 시에 대한 내 나름의 정의를 확립해 나가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되어진다.
나만의 시를 찾아가는 길
그러나 한 편의 시를 쓰고 난 뒤 또 하나의 새로운 명작을 세계문학사에 편입한 양 도연한 기분으로 한 6개월쯤 지났을 무렵, 내게는 또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그것은 마치 악몽과 같은 것으로서, 예컨대 하늘의 달을 노래한 나의 시가 같은 달을 노래한 명가(名家)의 달과 어째서 표현이 달라질 수 있느냐는 근원적인 의문이자 질투심이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사물에는 합당한 하나의 단어밖에 없다는 서양의 일물일어식의 사고방식에 잘못 감염된 결과였다.
그 격차로 하여 번민과 초조에 싸인 채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워야 했는지 돌이켜보기조차 싫었던 한 추억이 가슴에 심어진 그 무렵의 내 나이는 열 대여섯살 가량이었다. 어쨌든 나로서는 하나의 탈출구를 만들어야 했다.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아무도 써보지 않았던 주제, 시로 나타난 바 없는 사물에 대해 내가 제일 먼저 손을 대어보자.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문제점이 저절로 해소될 수 있지 않은가. 풀어 말하자면 견주어볼 잣대가 필요없는 작품을 써보자는 으뭉함이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방법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준비과정이 필요하였다. 우선 누가 무슨 시를 이미 써서 발표하였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발표된 시를 돌아볼 겨를조차 없이 발표된 모든 시를 읽어치워야 했다. 그것은 굉장한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었지만 한 일이년간, 나는 학업마저도 소홀히 한 채 오로지 읽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마치 열병에 걸린 것처럼, 신들린 것처럼 갖가지 시집에 매달리고 있었던 그때의 나를 보고 착하기만 하신 무학의 어머니가 학교공부를 하는 것으로만 여기셨던 일은 지금도 내 가슴에 굵은 못이 되어 박혀 있다.
하지만 다행한 일은 그 무렵만 해도 지금처럼 출판이 활발하지 않은 때여서 내가 읽어야 할 시집의 수량이 얼마 되지 않았다. 번역된 것까지 쳐도 그랬다. 그래서 부족한 시 독파의 양을, 문학잡지에서 찾기로 하였고, 그때문에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의 내 책가방은 도중의 서점에서 구입한 고본 문학잡지들로 불룩하였을 뿐아니라, 남은 한 손에는 으례 몇 십권의 묶음이 들려 있게 마련이었다.
을지로5가 근처에 살고 있었기에 주변의 동대문 일대의 서점이란 서점은 다 거칠 수 있었을 뿐 아니라...고마우신 어머니가 아낌없이 내 학구열(?)의 경비를 대주셨던 것이다. 그런데 잡지를 구입하면서 내 숙제의 양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시만 골라 읽기에는 투자액이 아까워. 같이 수록된 소설이며 평론까지 아낌없이 읽어버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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