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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의 여정 – 시인의 내면을 그리다

by 토끼투끼 2024. 11. 6.

시란 무엇일까. 문학 이론과 작품을 헤매며 나름의 답을 찾아보려 했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한 편의 시는 내가 붙인 이름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태어나며, 그 이름이 가진 울림 속에 사물의 본질이 서서히 드러난다는 것을. 시가 시작되는 그 순간, 나는 다시금 사물과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의 여정 – 시인의 내면을 그리다

시, 이름을 부르는 예술의 시작

문학에 대한 갖가지 이론과 작품, 그리고 그 중의 한 자리를 차지한 시와 그에 대한 구구한 논의를 읽어나가는 동안, 내 혼란된 머리는 서서히 정상을 되찾기 시작하였고, 사물에 대한 내 눈길도 전과는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어느새 나는 하나의 사물이란 누군가 불러주는 이름에 의해 새로이 태어나게 되는 것임을 깨닫고, 내가 붙여야 될 이름. 그것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것은 시에 대한 나의 가장 구체적이고 명확한 최초의 정의였다고 지금도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대로 문자화시키고 그로부터 이제도록 나는 한 편의 시란 하나의 이름이며, 그 이름이란 사람의 감정일 수도 있고 정신일 수도 있고 생활일 수도 있다는 갖가지 가능성 중의 하나를 골라잡았다가 버리고, 버렸다가는 다시 손에 쥐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다시 말해 버리고, 갖는 가장 단순한 행위의 되풀이로 하여 이윽고 하나의 내용이 정해지고, 그 내용에 합당한 이름이 붙여지는 이러한 과정이 곧 시작 (詩作)의 절차라 할 수 있다.

 

허균의 시화,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피어나다

예컨대 한때 내가 열중했던 옛 인물들의 시화에 있어서도 이러한 방법이 적용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로 허균(許筠)을 들어보자. 허균은 알다시피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서 국문학사에 길이 남은 소설 <홍길동전>의 작자이자 정치적으로 상당히 불운하여 붕당 사이를 떠돌아다님으로써 많은 욕을 먹었고 끝내는 서얼들과 무리를 지어 난을 꾸미다가 붙잡혀 처형이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천재 여류시인 난설헌의 오빠이기도 했다. 이 일대의 재사를 시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능한 대로 그의 모든 것(정보)을 알아야 했고, 그 다음에는 되도록이면 모든 것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고 버리는 작업을 해야 했다. 더 이상 지워지지 않은 몇 개의 분명한 사실이 남았을 때, 그때 비로소 나의 시는 첫구절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허균의 눈이며 코를 그리거나, 얼굴이 어떤가를 묘사하기보다는 그가 누구인가를 나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전개된다.

 

지난 여름에는 홍길동의 나라 율도를 다녀왔습니다.

 

마침내 내가 보여주게 된 첫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의 이상향인 율도를 사실상의 섬으로 바꾸어 놓지 않으면 안되게끔 모든 상황이 감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구절은 다시 반전하여 그곳이 실은 사실상의 섬이 아니라 상상의 섬임을 밝힘으로써 사실과 상상이 같이된 상태로 치환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로부터 허균에 대한 시는 자연의 생명력을 갖는다. 그것은 시인의 개입이 필요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시 스스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마땅치 않은 구절이 들어오면 시의 강한 반발이 인다.

이 논리화할 수 없는 시의 생명력, 그 스스로의 작용을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불기능이 시 안에서는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작동이 된다는 사실이다.

 

 

시와 상상의 경계, 율도의 섬에서 찾은 생명력

우연의 우연은 필연이 될 수 있듯이 나는 상상 속에서 상상의 공기를 마시고 상상의 하늘을 보고, 상상의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시를 위해 처음부터 예비되어 있던 것들이며, 동시에 버려져야 할 것들은 모두 버려져 있었던 상태임이 확실하다고 적어도 나 자신은 그렇게 믿고 있다. 여자들의 몸 안에서 하나의 생명이 자리잡고, 스스로의 성장을 도모해 세상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듯이, 시의 이미지란 시인의 내부에서 생명의 출산과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율도」의 전문을 보기로 하자.

 

지난 여름에는 洪吉童의 나라 율도를 다녀왔습니다. 율도 그곳은 사실 상상 속의 섬입니다. 소설가 허균의 소설 속에 그려진 이상의 나라입니다. 그의 별명은 올빼미로서 敗류와 즐겨 노닐었다 합니다. 그는 또한 머리며 두 팔 두 다리 몸뚱이가 제각기 찢겨져 죽음을 당했던 비운의 혁명아였습니다. 처음에 나는 율도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섬으로 여겼습니다. 물론 춘섬이의 아들 吉童이가 임금으로 있다는 율도는 지도의 어느 곳에도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녀왔습니다. 율도의 공기를 마셨고 율도의 하늘을 보았고 율도의 사람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상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허균은 그곳에서도 또한 머리며 두 팔 두 다리 몸뚱아리가 찢겨져 아무렇게나 길가에 나뒹그라져 있었습니다. 명아주풀 한 포기가 다만 그의 영혼을 받아들여 바람이 불 적마다 시나브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 「율도」

 

「율도」를 발표하면서, 잡지사의 주문대로 조그만 메모를 달아놓았다.

 

세번째 시집 「 律 」을 내놓고 한동안 시를 잊고 지냈다. 그러나 그것은 차라리 고통이었다. 「율도」는 그후의 네번째 작품이었다. 앞으로도 나는 우리 정신사의 한부분인 이들 한국인들과 연결시켜 작품을 쓰고자 한다. 그러나 평전이 아니다. 언제나처럼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함을 쓸 뿐이다.

하지만 시가 무엇인지 이제는 확실히 알았노라고 게염을 부리고 싶은 나이가 되어도, 처음 시를 쓰겠다고 달려들던 그때처럼 시를 모르기에는 매일반인 것만 같다. 그것이 비록 단순한 감정의 발산이 아님에는 틀림이 없겠지만, 발산이라는 면에서 바라보기에는 그다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내게 있어서의 시란 끝없는 발산인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