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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이어지는 시의 여정: 사물의 이치를 따라 쓰다

by 토끼투끼 2024. 11. 9.

천하의 사물은 무궁하고 나의 추측은 유한하니, 내가 이미 안 것을 미루면 '마음 밖에 물건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나, 내가 미처 모르는 것을 헤아리면 마음 밖에도 수많은 사물이 있는 것이다. 더욱 이미 안것 가운데도 미처 알지 못한 깊은 것이 있으니 아는 것은 실로 얼마 없는 것이다.

-崔漢綺의 氣測體義

 

끝없이 이어지는 시의 여정: 사물의 이치를 따라 쓰다

무궁하고 오묘한 사물의 이치

일찌기 어느 옛사람은 바람 소리를 나누어 몇 십 가지로 열거하였지만, 사실 바람 소리가 그러한 세목으로만 끝난다면 세상의 사물이나 이치가 무엇에 필요하랴. 다시 말해 옛사람들이 이름짓고 가름하고 버리는 것이 완벽하다면 뒷 사람의 할 일이 따로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세상의 사물이나 이치란 참으로 무궁하고 오묘하여 사람마다 다 주어진 몫이 있게 마련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생각 아래 시를 쓴다고 감히 장담하는 바다.

요즘에 나는 간혹 시에 대한 질문을 받는데, 그때마다 한 가지로만 대답한다.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는 일체의 것을 시로 옮기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내 대답의 요지이자 전부이다.

따라서 시를 쓰는 데 따르는 무슨 고통 따위가 내게 있을 리가 없고, 그렇다고 대단한 즐거움에 빠질 턱도 없다.

세상 만사가 다 나의 관심이고 그 대상인 만큼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라. 그저 옮기는 행위를 할 뿐이다.

그리고 또한 내가 기계가 아닌 것을 감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연유한다.

즉 수없는 되풀이인데도 그것이 하나도 같지 않다는 점을 나는 늘 누구에겐가 감사하고 있다.

 

자연과 하나를 이루는 것

나는 다만 어제 내가 본 바람이 오늘 내가 보는 바람과 틀리고, 내일 보게 될 바람과 다르다는 것을 언제나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늘 이러한 깨달음 속에 살고 싶어한다.

그것은 우리 앞의 자연이 살아 있음을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일이자 때로는 나 자신이 곧 자연의 하나로 변신하는 일이기도 하다.

숨쉬고 있는 자연의 숨소리를 듣고, 생각하고 있는 자연의 뜻을 헤아리고, 말하고 있는 자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 이것이 내 작시의 한 규범이 되어 있다.

따라서 나의 시는 놓아두어도 제 갈길을 따라 간다.

예컨대 첫시집인 장자시를 1975년에 출간하기까지 거의 10년을 나는 상상력의 훈련에 전력을 기울였고, 그 뒤에 두번째 시집 「심법」을 상재할 무렵에는 마음의 궁리에 힘썼으며, 세번째 시집 「율을 발간할 적에는 자연과의 습합을 노래했었다. 그리고 율을 세상에 보인 지난해 이래. 나는 한국적이랄까.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살다 간 것들에 대한 관심을 쏟고 있다. 그것은 세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번째 유형은 인물들에 대한 것으로, 고산자(古山子). 매월당(梅月堂)·김립(金笠)·최북 등 자기 삶에 대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사람들과의 만남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그 두번째 유형은 사람과 자연이 일체가 되어 어우러지고 있는 고시대에 대한 관심으로 최근 월간문학지에 연재했던 「달은 즈믄 가람에의 연작시들이다.

마지막으로는 어느새 우리 곁에서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우리것들. 일테면 풍경, 종등잔과 같은 것들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는 일인 바, 이 세 가지를 한데 일컫기 위해서는 편의상 한국적인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이 또 어떤 과정을 위한 시기인지는 아직 나 자신도 잘 모른다. 시가 가는 길. 그것은 오로지 시에 맡길 수밖에 없다.

 

사물과 이치란 그저 놓아두는 것

사물과 이치란 그저 놓아두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황노의 차구(借句)가 될까. 벌레울음소리가 드높은 밤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나이들수록 배운 것을 조금씩 까먹게 마련인데 언제나 아는 대로 다 말하는 病만은 버리지 못한다 꽃이 지고 새가 우는 까닭조차 헤아릴 수 없어 저자거리에 숨어 한 잔 술에 몸을 맡기기도 한다.

잘난 이름 석 자를 내두르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돌아다님은 다만 뜻한 바를 펼쳐보임이다 그때 그 구름 속에 뿌리를 내렸던 난초잎을 기리며 벌레울음소리에 장단을 맞춰보는 밤이 늘었다.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호다. 조선왕조 전기의 도학자로 도학정치를은 주장했던 사람이다. 자신의 이상을 제대로 펴보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말았다는데 동정이 간다. 뿐만 아니라 그 근엄한 학자에게도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적인 면이 많았다. 위의 시에 든 대목들은 거의가 그의 시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일테면 일종의 편집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 시를 씀에 있어 자신의 언어로만 쓸 수 있다는 것인가.

오히려 남의 언어도 자신의 언어로 바꾸고, 남의 이야기도 자신의 이야기로 풀어버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시가 곧 하나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위 물고기 자물쇠를 열면 그림이 몇 장 있다.

언제부터인가 내게는 달마의 초상화가 한 장 두 장 늘어나게 되었다. 물론 그는 알려져 있다시피 중국 불교의 개조라고도 할 수 있는 선수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릴 때는 실물보다는 마음에 의탁해서 그리게 된다. 그럼으로써 그리는 사람의 한 경지가 거기에 덧붙여지는 것이다. 시간날 때마다 농을 열고, 그 속에 고히 간직해온 그림 몇 장을 마치 보물처럼 꺼내어 펼쳐본다. 그것은 결코 비싼 것이 아니다.

대개가 요즘 화승들의 그림이다. 시간이 있을 때 자유롭게 자재롭게 그린 것들이다. 거기 그려진 한 사람. 결코 같은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 여러 명의 한 사람을 보며, 사람이란 이렇게 갖가지로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나의 뜻이 그 뜻대로만 풀이될 수는 결코 없는 것일까. 이런저런 궁리를 해대다 보면 몇 시간이 지나곤 한다. 이런 것을 가리켜 무아경이라고 하는 거겠지 하고 외람된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생각이 많다보면, 시로 요약하기가 한결 쉬워진다.

그렇지 않은가. 세상의 잡사라 해서 시가 다루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잡사가 많을수록 그것들 중에서 골라낼 수 있는 양이 많아지게 된다. 불가에서는 잡념을 버리라고 하지만 시의 경우에 있어선 더욱 잡념을 키워 백념백상, 생각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야만 좋은 시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된다.

내가 시에서 알리고 싶었던 것은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천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주변에 살고 있으며, 그 중간 무렵에도 수없이 살다 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들에겐 이름을 전해야할 이유도 없었고, 또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 두는 사람들도 없었다.

예컨대 중국의 옛책들에 나오는 재미있는 이름들을 보자. 백수광부(夫라거나, 윤편輪)이라든가 사람의 이름으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그것들은 사실 저자가 무명씨들을 그렇게 표현한 것뿐이다. 역사란 기실 이들 무명씨와 유명씨들이 한데 이루어 짜는 천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이 무명씨들. 그들에 대한 내나름의 조시(弔詩)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