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매미소리를 매개삼아 40년대, 구체적으로는 해방의 해인 45년을 중심축으로 하여, 그 이후 해방 50년, 또는 광복 50년이란 현재를 되짚어 보고 있다. 특히 이 시의 일미는 '그나, 저 소리는, 이 시절 저 매미소리는 그 시절, 그때의, 이는' 등에 나타난 '그. 저·이' 등의 관형어에 있다. 한 음절의 지시 관형어들이 바로 과거·현재를 교차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시의 압축미와 함께 과거와 오늘의 역사에 대한 시인의 비극적 정서를 싣고 있다. 그런데 둘째 행의 '저 소리는'의 주격조사가 목적격 조사로 바뀌어야 되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저 소리는 들었을 리 없지만'은 '소리가 듣는다'는 말인데, 듣는 주체가 소리라는 진술이 비논리적이며, 만일 의도된 범주위반이라고 해도 그 의미가 전체 텍스트 구성상 적당치 않다.
해방공간의 역사
어쨌거나 해방공간의 역사는 해방 • 광복의 기쁨과 동시에 대립 · 분단이라는 이중의 공간이었다. 그날의 의미는 현재에로 이어지고 있고 그 비극의 광복 50년이라는 아이러니 구조위에서도 '어찟건' 광복은 광복이고, 우리는 그 이후를 '복받아' 살아왔다는 자조의 목소리를 위시에서 만난다. 그 복은 비록 '세상이 험해지고 높아지고 강파라지면서' 낡고 퇴색해버렸고, 복이라는 단어 역시 동일한 운명에 처했지만, 전통의 생활상과 자연의 가치는 이 험한 세상에도 통시적 본질상이 아니냐는 역설이다. 그래서 '지난 춥다추운 대보름날 부스름 해선지', '내 귀와 매미는 끝없는 나의 인연'이라는, 즉 전통생활과 계절을 맞는 자연인으로 인간이라는 동양적 사고틀을 알레고리로 택하고 있다.
현대화는 분명 서구적 문명발상이었다. 문명인으로서 서구의 인간개념은 자연 정복자로서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동양의 인간개념은 자연과의 분리구조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그것이었기 때문에, 비록 서
구화 또는 현대화의 물결속에서 분리의 도정을 밟아왔지만 그 내밀성, 또는 무의식의 구조는 변할래야 변할 수 없다는 인식을 우리는 고형렬의 시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 본질의 목소리에서 전통 정서의 향수를 거듭 만난다는 말이다.
리리시즘의 시
리리시즘의 시에는 이 외에도 시인의 내면적 성찰을 통하여 무소유의 자세를 지향하는 시와, 해탈의 경지를 지향하는 시. 그리고 사랑과 꿈을 노래하는 시. 자연예찬을 그리는 시. 민족의 전통 정서에 대한 향수 등으로 나타나는데, 그 현대적 의미망은 현실초월 또는 과거로의퇴행을 통해서 현실 반추하기에 이른다.
1920-30년대의 카프시들은 시인 개인의 서정적 향내 보다는 구호. 외침 등이 높았음은, 그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분명 시 예술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뼈다귀 시'라는 당시의 명칭이 이를 확인해 주고도 있지 않는가! 그것은 시를 수단으로 하여 비판, 또는 집단적 목소리, 즉 이념 드러내기를 목적하였기 때문이다. 시를 통한 목적성취가 주도됐던 70-80년대의 민중문학의 예술적 성취도 역시 부분적으로는 떨어진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집단창작의 자세 또한 현대적 창작 자세는 아닌 것이다. 아방가르드가 최초에 집단의 목소리로 나타났다가. 그 시대적 부적합을 스스로 인지하고 물러난 점에서도 이미 확인되는 바이다.
이는 물론 우리의 당대 정치현실에 대한 변혁적 대응자세였기 때문에 나타날 수 밖에 없는 현상이었기도 하다. 최근에 이르러는 그 시적자세가 집단 차원의 갈등 제기가 아니라, 개인 차원의 갈등 표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문제는 가난 주제가 여전히 지배적이란 점인데, 비판적 리얼리즘의 방향성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점에 비추어 우리 시의 이와 같은 성격을 소박한 리얼리즘으로 칭할 수 있겠다.
애초에 울타리 없었으니 사립문 없고 마당 귀엉치 고목 밤나무 너댓그루 그래도 철따라 알싸한 밤꽃내 홍건히 괴던 그늘 아래 오른 흑염소 한쌍 그리하여 그 집에 사람 산다는 흔적을 염소로나 하여금 느껴야 했던 쏠쏠한 배경 뒤로 거북이 등처럼 실금이 쩍쩍 일어난 시멘트 장광 위에는 테멘 간장독 된장독 하나 그아래 키 작은 맨드라미 봉숭아 저절로 어울린 키 작은 서정 속으로 낙수에 고랑이 패인 처마 토방어귀엔 三代로 대물린 확독 꺼시러운 보리쌀 확질의 흔적 너머 잔솔불에 그을린 옹벽녹슨 못대가리엔 일찍부터 집 나간 자식놈들 얼굴같은 올망졸망한 씨앗 봉지들 그곁에 삐걱대는 정짓간 문짝 한쪽을 슬그니 밀어보면 물기 마른 살강 위에는 말년의 양주 닮은 밥사발 국사발덩그러니 남아 있던 두벌 물 바래고 해진 노오란 머릿수건을 저문 노을빛으로 벗어들고 들어서던 할미꽃 한송이 앞치마 품에 눈물처럼 빨간 고추 한줌을 그나마 밤나무 가지 그늘에 가리워햇볕도 애잔하던 툇마루 모서리 칼퀴손 무심히 놀려 널어주던 몸통만이 아니라 가지에 가지 끝에 잔 이파리들까지 어쩌다 쥐 밤 몇 톨 간신히 여문 밤송이까지 벌레는 죄다 먹어 그집 사무치게도 고요하던 집.
소박한 리얼리즘의 시
최근 우리 시의 일부는 종래의 비판적 리얼리즘의 시가 지녔던 분노와 고발의 기능적 힘에서 전통 서정시의 비극미가 함유된 소박한 리얼리즘의 목소리로 변모되고 있다. 물론 고발의 목소리는 내재되어 있으나, 그 표출방법에 있어서 구호가 아니라, 비극적 자아인식이 지배한다. 이와 같은 현상이 현대화라는 물결의 힘에 기인하고 있음을 동구권의 정치·경제 현상을 통해서도 입증되는 바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이념의 벽을 타파한 양상인 것이다. 따라서 소박한 리얼리즘의 시에서도 전통 리리시즘 시와 공유된 부분이 많은데, 그것에는 전통에 대한 향수, 파괴 자연에 대한 고발, 공동체 사회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표출되며, 다른 점에 있어서는 소박한 리얼리즘 시는 가난주제가 여전히 그 주류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학적 층위에서 이 양자의 공유점은 비극미에 있는데, 그것은 양자가 잃어버린 공간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그러나 전통이라는 골동품의 세계가 정신의 받침대는 될 수 있겠지만, 현대화의 현장의 힘을 거슬려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받침대까지는 될 수 없음은 현대인의 비극임에 틀림없다.
정윤천의 위 시에서도 이러한 세계를 담아내고 있는데, '三代로 대물린 확독 꺼시러운 보리쌀 확질의 흔적 너머 잔솔불에 그을린 옹벽녹슨 못대가리엔 일찍부터 집 나간 자식놈들 얼굴같은 올망졸망한 씨앗 봉지들 그곁에 삐걱대는 정짓간 문짝......' 등 캄마, 종지부 하나없이 텍스트 서두에서 말미까지 긴 호흡의 파장으로 구성된 이 시는 과거 우리네 가난했던 시절을 소재• 주제로 해서 시인의 비극적 서정을 객관화시킨 소박한 리얼리즘의 성공적 시로 보인다. 특히 이용악의 '낡은집= 흡집'을 연상시키는 '벌레먹은집= 고요하던 집'은 이용악의 그것이 현재의 흡집이었다면, 정윤천의 그것은 과거시점으로 과거의 가난과 슬픔에 대한 현재의 그리움이 뒤엉켜 있다.
전통 리리시즘의 서정시와 비판적 리얼리즘의 목적시에 있어서 두드러진 차이를 지적하면, 함축적 독자와 예정된 독자에 대한 지향의도의 차이가 있다. 서정시는 작가의 내면 고백 내지는 독백이 주가 되기 때문에 독자에 있어서도 최소의 독자로서 작가 자신에만 국한지을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잠재의식에는 작가의 말에 동감해줄 함축된 독자가 있다는 가정이 전제된다. 그러나 목적시의 독자는 시가 이미 구체적인 목적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독자 또한 구체적이다. 텍스트가 프로레타리아를 위한 내용이라고 할 때, 작가의 목소리는 그 대립의 계급을 향하게 된다. 지배계급에 대한, 그리고 사회제도의 비리. 모순에 대한 비판적 대응적 목소리가 주도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서정시의 미적 대상은 자연친화에, 그리고 그 미적 의식은 비극미에있다면, 목적시에 있어서는 친화력의 대상이 프로레타리아 계급이며, 미적의식은 계몽성에 있다. 사회 지배계급의 타도와 전도, 그리고 무산계급의 계몽에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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