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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

by 토끼투끼 2024. 7. 15.

모더니즘의 세계가 리리시즘과 겹쳐진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목가적 세계이다. 보들레르의 미적 자세처럼 모더니즘은 목가적 모더니즘으로서 모더니즘, 그리고 반목가적 모더니즘으로서 모더니즘의 이원적 세계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현대성 내에서의 삶에 토대한다. 그것이 바람직한지의 여부를 떠나서 우리는 현대에 살고있는 현대인이기 때문에, 현대의 문제점은 그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모더니즘의 지론을 외면할 수는 없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꽃잎들이 춤춘다 고공낙하 패러슈트 하얀 토끼풀 노란 민들레파란 패랭이 춤을 춘다 허공에 박혀 꿈을 꾼다 바람에 나부끼며 나부끼며 보라 저 긴 어둠 그 발자국 밑으로 불꽃놀이 펄럭인다 떨어진다 오 낡은 연애편지 구절 속에서 걸어나오는 그림자 검은 그림자 몸 속으로 자꾸만 기어드는 목소리 자꾸만 벌레처럼 축소된다 사물들의 하중(荷重) 문이 열리지 않는다 박일, <열병 1>- 「학산문학」,

1995 박일의 시 '열병'들은 현대적 삶의 무게 밑에서 불안해하고 좌절하는 소용돌이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인간은 사물로, 사물은 인간을 지배하는 전도된 구조속에서 인간의 흔적들은 낡아간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속에 녹아버린다'는 마르크스의 말처럼 현대라는 대기는 전통적. 그리고 현재의 그 어떠한 견고한 것도 다 녹혀 사라지게 하는 강 력체인 것이다. 남아서 정체의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흐르고 변모하는 빠른 속력의 그것일 뿐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이 열병을 앓는다고 보는 박일의 의식은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열병'이라는 매개에 현대인을 비유한 점으로 보아. 그는 아직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열병은 불치의 병이 아니라 치유 가능한 병이기 때문이다. 현재가 회복가능 혹은 불가능의 추이가 어떠한지에 대한 판단을 떠나서 말이다. 현재가 열병의 실체라는 전망에 내포된 시인의 인식은 치유되어야 한다는 추구의 자세 역시 내재된 것으로 보아야. 현대를 진단하는 주체적 개인으로서 시인이라고 할 것이다. 악마적 현실을 담아내는 그 언어들 역시 마성에 잡혀있을 지라도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형

모더니즘의 이와 같은 인식이 확장되어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마성의 현실이 상징. 은유 등의 은폐차원을 벗어나서, 그와 같은 상황이나 사건의 사실적 · 직접적 장면제시의 유형으로 나타나며, 기법적으로는 모방 • 인유• 꼴라쥬. 패러디 등으로 나타난다. 언더그라운드 시로서 컴퓨터 통신에 의한 비문단적 시작 경향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겠다. 이때는 병을 앓는 현대인이라는 시인의 진단적 의식도 감지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포스트모던의 삶을 즐기며 유영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여기에는 시적 언어유희가 무의미한 기표적 유희차원으로 끝날 위험도 있으며, 진실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내밀성이 무화될 위험도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적 경향은 패러디의 정신작용에 의한 과거의 현재화, 전통 향하기 등으로 나타난다. 패러디에 의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은 모더니즘의 목가적 전통에 대한 긍정적 인지라는 측면에서 모더니즘에 겹쳐지는 부분이다.

1919년에 뒤샹이라는 작자가 모나리자의 얼굴에 독일식 카이저 수염을 붙여 놓고 화장실에 가서 회회덕거린 이유를 마주하면서 현실의 뒤틀린 국면을 희극적 장치로 구현한다는 점에서 보다 현대적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희극에 의한 대중적 전달에 가깝다는 측면에서는 모더니즘과는 다르다. 모더니즘은 엘리트적이지대중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모더니즘이 문제인가' 라는 문제는 우리의 현실이 포스트모던의 현대화라는 도정위에서 값싼 대중적 전달위주로 치닫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제동으로서, 그리고 미래적 전망을 모더니즘의 전통에서 찾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동궤의 차원, 즉 전망의 진단으로서 포스트모던의 공간 위에서 다양한 목소리의 서정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 전통 서정의 비극상과 현대 서정의 희극상들이 교차되면서 사조적 겹침뿐만 아니라, 한 시인의 시세계에서도 겹쳐서 나타난다.

 

서정적 존재 진정한 휴머니즘

이러한 양상은 비록 현대인으로서 우리가 도시적 인위공간에서 생활하지만 자연적, 목가적, 전통적, 본질적 삶에 뿌리를 둔 서정적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속에 녹아버리는 현대에서 잃어버린 공간을 찾아가는 의식행위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의 실존적 행위망이며, 그것은 또 포스트모더니즘의 진정한 정신작용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던 공간의 진정한 휴머니즘은 자연의 인식구조망 속에서 개별적 방법에 따라 구현되는 자유정신의 행위에 있기 때문이다.

황지우의 위 시는 신문에서 그 소재를 취하여 뉴스의 다각성을 제시하는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 창작을 향한 굴절. 또는 상상력에 의한 표상없이 신문에 보도된 현실의 한 단면을 시의 틀에 기대어 재수록한 것이다.

특히 일기 예보와 전쟁상황에 대한 뉴스를 주로 제시한 것으로만 볼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일기 예보 중에서도 '흐림, 짙은 안개, 비, 눈, 폭설' 등 어두운 이미지가 강화된 일기 내용이거나, 전쟁관련 상황의 뉴스 등을 위주로 제시하여 그 이면에 시인이 의도한 현실 부정의 정신을 함유하고 있다. 즉 시를 향한 창작적 상상력은 제거됐지만, 현실의 습득물을 통해서 그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해체가 단순히 해체를 위한 실험의 극명함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현실이 빚어낸 결과라는 사실을 재삼 확인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