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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의 현주소

by 토끼투끼 2024. 7. 15.

80년대의 문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지평과 그 전 세대에서 연속되는 비판적 리얼리즘의 지평위에서 시대적 특성을 담아낸다. 상대적으로 모더니즘과 리리시즘의 목소리는 약세로 흐를 수 밖에 없었으나, 그렇다하여 양자가 80년대의 현실과 무관할 수는 없었다. 모더니즘은 그 자장안에서, 그리고 리리시즘도 그 자장안에서 현실과의 길항관계를 끊임없이 보여왔다.

 

우리 시의 현주소
우리 시의 현주소

 

리얼리즘 대표

비판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시즘은 현대화의 도정에서 그것의 비판과 유토피아적 전망을 함유한다는 점으로 모더니즘과 동궤에 선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비만은 모더니즘을 리얼리즘으로 환치한다. 그것은 마르크시즘의 출발이 자본주의와 현대화를 비판하는 데 있기 때문이며, 모더니즘 역시 현대화 위에 그 출발이 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더니스트는 현대화의 소용돌이에 안주하면서 유토피아를 모색하는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는 현대화를 불협화음과 갈등의 종말적 세계로 생각하여 사회주의 사회로 유토피아를 설정하고 있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우리 문학의 비판적 리얼리즘은 혁명적 의지와 더불어 그 비판의 대상을 노동자의 인간적 조건을 향하는, 그리고 농민의 공동체적 삶을 향하는 지평위에서 제도의 모순. 부조리 타파를 부르짖는 목소리를 구현한다. 양상에 따라서는 공동제작이라는 민중문학도 출현하였고, 혁명적 변혁을 향한 거친 자세는 문학이라는, 구체적으로는 시라는 장르의 벽을 벗어나기도 하였다. 이처럼 동시대성으로서 비판적 리얼리즘이 집단적 갈등을 구현하였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자본주의 현대화 속에서, 그리고 폭력적 정치현실 앞에서 개인의 갈등을 구현함으로써 80년대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마르쿠제에 의하면 예술의 현재성은 소외된 존재라는 측면에서 예술의 현실 대웅적 위치가 있다고 한다. 현실은 언제나 문제적 현실이기 때문에, 그 현실에 대응하는 소외된 존재로서 예술의 존재의미가 있으며, 현실과의 길항이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시의 공간은 도시적 일상과, 도시인으로서 현대적 기표로 떠도는 기계적 인간, 그리고 철저히 파괴된 전통적 삶의 구조. 중심가치의 부재, 묵시록적 현실상 등으로 그것은 국내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 시각에도 벌어지고 있는 세계의 전쟁참상 등이 전통 기법의 과격한 파괴로서 등장하였다. 그러한 시적 장치는 죽음의 공간에 의한 상황. 사건의 처리가 주요한 특성으로 자리하였고, 더불어 화상적 장치 및 순차적 언어배열 거부로 인한 역순의 배열, 꼴라쥬 등도 등장하였으며, 가장 중요한 성취는 패러디의 팽배를 들 수 있다. 패러디에 의해서 전통과 과거의 정신들이 현재화 되었는데, 이는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나타난 성과에 의해서 설명되는 논리이다. 독자는 잊혀졌던 과거의 정신상을 패러디에 의하여 환기하게 되는 효과에 직면하는 것이다. 작품의 소통구조 측면에서 이를 파악할 때, 순차적 시간구별의 무화에 의한 현재화로서, 즉 향수층에 의하여 의미화되는 과정속에서 해석되는 텍스트의 미적 가치에 해당한다.

그후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치상황의 변화와 함께 사회상 또한 변모를 보이는데, 문학에 구현된 그것의 실체를 보면은, 다양한 사조적 창작경향이 대두된다. 최초의 지적처럼 우리가 원하거나 아니거나에어쩌면 무관하게 세계는 국경의 경계를 초월하고 있고, 비록 외형일지라도 나타난 생활상은 민족적 특성보다는 현대적 삶이라는 동일상으로 나타난다.

가치구조는 절대치가 아니라 상대적 가치 시대로 화하였고, 맥루한이 예견했던 지구공동체는 전파·전자 매체에 의한 세계화로서 나타나고 있다. 전파매체의 활성화는 우리나라에서도 서울중심에서 점차지역화로 넓혀가게 되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사회구조 위에서 문학은 존재의 본질 및 민족적 정서를 구가하는 전통 리리시즘, 공동체적 정서를 지향하는 소박한 리얼리즘으로 변모한 비판적 리얼리즘, 현대화의 소용돌이 중앙에 안주하며 그 비극을 구현하는 모더니즘, 그리고 거치른 파격에서 패러디로 대표되는 안정된 장치로 자리한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위상이 90년대의 문학으로 활약하고 있다. 더불어 컴퓨터 보급과 함께 소위 비제도권 문학 또한 포스트모던 시대의 저항적 장치로서 자리하고 있음을 외면할 수 없다. 그것의 미학적 가치를 접어둔다 하더라도, 서구에서는 언더문학의 위상은 프로문학인의 그것이 아니라, 아마추어의 그것이란 점에서 순수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문단의 제도권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자리하고 있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여기에는 문학성에 대한 평가가 주요 요건이다.

 

전통 리리시즘과 소박한 리얼리즘의 세계

우리 현대시문학사에서 리리시즘의 상징적 텍스트가 소월 시에 있음 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이후 현재에도 계속되는 리리시즘의 경향을 두고 모더니스트 일군에서는 이 시대에도 그러한 시를 쓸 수 있다는 행복함을 빗대어 야유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더니스트의 관점이 대변하는 것은 지금. 여기의 현대화 안에서 우리의 행복은 전통 서정 지향에 내재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전통 서정은 파괴되어 가는 현대의 실체이기 때문이며, 현실태라기 보다는 과거적 의식과 그에 대한 회귀의식으로서 사라져가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자연물 및 자연공간과 잃어버린 시간으로서 유년의 세계이거나, 전통사회의 모습들이다. 그와 같은 텍스트에는 현대성이 부재하기 때문에, 때로는 현실도피적 내지는 퇴행적 자세로 보인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텍스트의 외관에 의한 재단 입장이라면, 텍스트의 내밀성에 준한 작가의 의도에 초점을 맞추어 현실적 의미부여를 할 때, 그것은 현대화의 현대에서 분명 퇴행적 자세이기는 하나, 그 안에는 반모더니니즘이 추구해야 할 하나의 유토피아가 작용하기도 함을 간과할 수 없다. 잃어버린 시간속에는 잃어버린 가치구조가 내재해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향수는 현실과의 대비상태에서 의미부여해야 마땅할 소중한 현실대응 의식이 배태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나 우리나라 좋은 시가 많이 나오던 40년대의 저 소리는 들었을 리 없지만 세상이 험해지고 높아지고 강파라지면서 우리 시가 싸우느라 사나워졌지만 어쨌건 이 시절 저 매미소리는 그 시절 40년대의 소리와 다를 리가 없어서 나는 그때의 수많은 아픔과 여름철을 내 이몸의 귀로 즐겁게 듣고 있으니 지난 춥다추운 대보름날 부스를 해선지내 귀와 매미는 끝없는 낙의 인연이니 이는 복받은 여름 귀밝이소리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