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역사를 전통과 그 전통의 단절· 거부 • 파괴 등에 따른 시간적 순서로 분류할 때 실험의 자세는 당연히 후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전통과 그 전통의 해체에 따른 실험의 자세는 역사선 상에서 파악될 수밖에 없는데, 특히 현대에 이르러 실험의 정신은 전통에 반하며, 부정하는 요소로서 현대성을 대표한다. 동시에 시의 역사에 있어서도 실험성은 시의 현재성을 대변하기 때문에, 시에 나타난 실험의 정신 및 그 자세는 시의 역사가 어떠한 경로에 의하여 현재에 도달했는 가를 알 수 있게 한다.
詩와 거울
칼리니스쿠는 광의의 현대성을 자본주의 문명이 암시하는 객관적이고 사회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시간과 자아가 표명하는 주관적이고, 상상적 지속으로 드러나는 사적인 시간의 대립으로 정의한다. 시간의 대립이란 이러한 시간 개념에 상응하는 가치들의 대립이며, 또 현대성이란 예술이나 문학의 경우 역사적 상대주의의 개념으로, 이런 상대주의는 전통에 대한 비판의 형식을 띤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에 대한 비판으로서 실험의식은 현대성에 대한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실험은 모든 시에 다 해당된다'고 하는 월러스 스티븐스의 말처럼 실험이란 역사성이 없는 상대개념이기도 하지만, 그 실험의 양상이 다양한 요소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향은 현대라는 시대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시에 나타난 실험성을 통하여 현대의 특성을 대신할 수 있다. 즉 실험으로서 해체와 전위, 그리고 해체로서 실험과 전위 등은 이음동의어적 관계에 있으며, 이는 곧 역사적 개념이면서 동시에 상대개념이지만, 그 속성은 현대적 특성이라는 동일선 상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실험의 자세란 현대라는 시대적 징후를 드러내는 대표적 장치인 것이다.
또 실험의 자세가 동시대성을 의미한다 하여 현재의 시에 전통적인 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전통의 요소는 새로 온 시대 앞에서 외면되기도 하지만 또한 변화 · 수용되며, 때로는 온전한 틀을 유지하기도 한다. 이 점은 현대가 개인의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구성되듯이 시의 하위장르 또한 다양한 삶의 유형만큼이나 개인적이며 다양하다는 것을 뜻한다.
시에 있어서 실험 양상
시에 있어서 실험 양상을 우선 크게 두 줄기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시를 위한 시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를 담아내기 위한 구체적 작업의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전자의 경우는 흔히 비역사적·비현실적 등의 평가를 받으며, 후자는 시의 사회·역사적 기능에 초점을 맞춘 결과 비순수. 목적지향 등의 평가가 주어진다. 이는 물론 시의 기능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나타나며, 목적지향이란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정치적 현실에 대한 다른 이름이기도하다. 그러므로 시에 대한 인식적 해체거나 역사적 상황에 기인한 해체거나, 이 모두는 동시대의 변화의 추이에 의한 양상이기 때문에, 이詩와 에 따라 실험성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가 가능하다.
시에 대한 인식적 해체의 양상을 보면, 탈구조주의에 따른 해체주의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들의 출발점은 언어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 해체에서 비롯된다. 이와 같은 관점의 실험 결과는 현실인식에 있어서 비역사성을 띈다. 그러나 현대라는 시대의 커다란 조류에 의한 성찰에 비출 때, 비록 비역사적 인식에 따른 해체일지라도 언어를 통한 해체의 논리는 현대성을 가장 극명히 반영하기 때문에 비시대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해체적 언술은 언어가 고정된 의미를 부착한 존재라는 사고의 틀을 깨뜨리고, 그 사용여하에 따라 변화되는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언어의 특성을 새롭게 부각시킨다. 동시에 언어의 유희성을 통하여도 언어의미의 부유성을 밝히며, 그에 수반된 시인의식 및 시대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 흐름을 담지하고 있다.
한국 시문학사에서도 실험자세를 전통 부정으로서 현대성의 한 양상이며, 현대적 삶의 편린이라는 의미로 파악할 때, 그 계보는 1930년대의 시에서 부터 찾을 수 있다. 현대시란 장르적 명칭이 단지 시간개념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현대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전제할 때, 현대성의 두드러진 특징 하나를 세계인식에 대한 덧없음·불확정성·불신 • 불안 등으로 명명할 수 있으며, 이는 먼저 30년대 이상(李箱) 시에서 명확하게 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실험의 선구자 이상
언어가 대상을 지시한다는 개념으로 이상 시를 볼 때 우리는 이상시에 쉽게 접근할 수 없다. 이상 시는 그와 같은 언어의 전통적 개념을 깨뜨려 언어와 대상 간의 무질서, 시어의 산문화, 기호의 도입 등을 보여 준다. 이는 시에 대한 그의 실험의식을 극명하게 증명한다.
내팔이면도칼을든채로끊어져떨어졌다.자세히보면무엇에몹시합당하는것처럼 새파랗다.이렇게하여잃어버린내두개팔을나는 세움으로내방안에裝飾하여놓았다.팔은죽어서도오히려나에게 내이는것만같다. 나는이런얇다란禮儀를花草盆보다도사랑스레여긴다.
<第>전문
대상과 그 대상을 지시하는 언어 사이의 논리적인 의미상관을 무화시킨 위 시를 통해서 이상은 현실질서의 왜곡상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즉 의도적으로 현실의 질서가 왜곡된 무질서임을 드러내고자 하여 인체를 해부하거나, 그 해부된 인체를 장식적 사물로 사용하거나 하여, 자신의 비인간적 행위를 '예의'라는 인간적 행위와 대립시켜 실험성을 구현한 것이다.
또 이상(李箱) 시의 대부분은 산문체인데, 이는 전통적으로 지속된 사물이 지닌 상징의미로서 시어를 구사한 것이 아니라, 문장 구조에 의하여 어떤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인상, 또는 심리흐름을 서술함으로써 실험성을 의도하였다. 그 문장들은 구두점 없이 연결되어 호흡 간격을 폐쇄함으로써, 시의 외형에 의한 시각적 효과면에서도 폐쇄된 현실을 제시하고자 한 의도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이상은 전통적인 시의 구조를 의도적으로 해체하여 시의 장르 영역을 확장하였으며, 즉 시에 대한 인식적 측면에서 실험의 자세를 취했으며, 동시에 억압받는 무의식을 드러내기 위하여 의식화된 현실을 거부하는 전위의식을 실험하였던 것이다. 즉 시에 대한 인식적 측면 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부정의 정신을 이상은 시의 해체로서 보여줬던 것이다.
이상(李箱)은 또 다음 시에서 처럼 언어가 아닌 기호를 도입하여 언어에 의한 표현한계를 타파하고자 실험하였다.
△은 나의 AMOUREUSE이다.
나는하는수없이 울었다
VW이다
이담배를 피웠다
이여!나는괴롭다
-중략-
<破片의 > 일부
언어가 아닌 기호로 의미를 전달하려는 인식은 문학이 언어를 매개체로 한다는 전통 인식에 비할 때 심한 파격양상이며, 실험의식의 선도적 발현이다. 특히 형태시 특성으로 볼 수 있는 띄어쓰기, 행과 연구분의 무시는 시대의 질서가 무질서로 혼재함을 대변한다. 이러한 양상들은 시가 객관적 질서에 의한 언어유기체로서 통합되게 하지않고 부분들이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도록 배열함으로써, 지극히 시인의 주관적 의식에 근거한 추상화로서의 실험자세를 드러낸다.
이와 같은 이상의 실험 자세를 사조적 측면에서 파악할 때, 시의 전통적 양식 및 삶의 전통적 구조에 대한 부정이라는 의미에서 모더니즘적이며, 또 이성추구가 아니라 '이성적 주체의 탈중심화'란 측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이다. 물론 전위성이라는 아방가르드적 성향은 실험의 자세 및 그에 담긴 의식속에 창조적 토대로서 당연히 자리하고 있다.
더욱이 다음에서 밝혀지겠지만 50년대 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여타 전위적 시들에서도 이상과 같은 이상 시의 깊이 있고 다양한 실험34 와 거울 성을 뛰어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에 대한 세가지 인식과 논리 (0) | 2024.07.19 |
---|---|
실험시의 등장과 유형 (0) | 2024.07.19 |
전통 리리시즘의 서정시와 비판적 리얼리즘의 목적시 (0) | 2024.07.16 |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 (0) | 2024.07.15 |
우리 시의 현주소 (0) | 2024.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