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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대한 세가지 인식과 논리

by 토끼투끼 2024. 7. 19.

문학텍스트에 대한 비평적 안목이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의 언저리를 끊임없이 배회 또는 침잠하는 인식행위 및 그 논리에 다름 아니다. 비평적 인식의 향방과 논리의 짜임은 현실에 대한 인식에 따라, 그리고 현실 대응의 전략적 논리에 따라 선택되어지기 때문에, 비평적 안목, 또는 텍스트 읽기란 바로 현실 읽기며 그에 따른 현실 진단인 것이다. 현대문학에 있어서 현실에 대한 작가의 비판의식이 텍스트 내에 포함되어야만 한다는 엘리얼의 문학론을 재음미하지 않더라도, 이 시대의 문학관계인은 유야무야 현실판단론자이기 때문에, 비판의 안목도 비평장르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 역시 모든 문학관계인의 존재론적 화두이리라.

 

문학에 대한 세가지 인식과 논리
문학에 대한 세가지 인식과 논리

 

문학이란 무엇인가

특히 오늘의 문학에 있어서 문학의 존재성, 문학관계인의 존재성에 대한 위기라는 이구동성의 진단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화두가 '이 시대의 문학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시의성의 문학 존재론으로 대두된지 오래다. 마르크스의 지적처럼 대기속의 모든 것을 슈퍼스피드로 녹여버리는 것이 현대성의 징후이듯이, 어제 밤의 충격적인 비극도 오늘 아침 무감각한 옛일로 멀어지게 하는 불감증의 시대에, '문학의 위기'라는 아침의 진단 역시 저녁에는 아스라한 옛일처럼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위기란 인간의 위기이며, 삶의 위기와 동궤이기도 하기 때문에 인간의 삶의 위기를 토대로 하여 문학이 존재하는 의의가 있다고 할 때, 이 때야 말로 문학의 위상을 가장 돈독히 할 수 있는 시기라는 역설적 논리가 성립된다. 언제 문학을 위한 시절이 있었겠는가. 문제는 문학에 대한 시대의 위기의식 보다는, 무슨 문학에 대한 위기냐는 물음표 속에서 문학관계인들의 문학적 인식에 따른 오늘의 인간상 및 문학의 위상이 진단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때에 제시된 전정구 윤여탁 이광호의 비평적 전략은 어쩌면 어제의 진단에 따른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제란 바로 오늘을 구축한 시간이기 때문에 그들의 문학적 안목의 오늘의 유효성이 있다.

전정구의 약속없는 시대의 글쓰기는 주로 주제 비평, 실제 비평을 통하여, 그리고 소설보다는 시비평 위주로서 독자에게 비평읽기의 즐거움을 부여하고 있는데, 선정된 텍스트들은 대부분 80년대 이후 해체시군단이라고 명명된 시인들의 작품으로, 그로써 포스트모던이라는 후기산업사회의 한 풍속도를 해부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텍스트에 대한 접근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처럼 텍스트간의 '관계 맺음의 방식''끝없는 의미의 갱신'이라는 탈구조적 관점에 의한 해체비평으로 시도되어 있다.

전정구는 현재를 '약속없는 시대'라는 위기의 시대로 인식하여, 그 약속없는 시대에 글쓰기 주체로 부상한 신세대 시인들을 '약속없는 세대 시인들'이라고 칭한다. 그들의 시학의 전략을 'TV/VTR 영상화면에 비유되는 가볍고 얄팍한 감각적 표현기법' 이라고 지적하면서, '젊은 시인이 썼으니까, 새로운 세대가 썼으니까 신서정시가 된다는 논리 는 어불성설'이라 하여 '신세대의 시신서정시'라는 부등식속에서 신세대 시인들의 현대적 시의 자세를 비판하고 있다. 그 비판의 대안으로써 신세대 시인들은 합리주의 세계관이나 기계론적 자연관을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거부해 내는 능력, 시쓰기를 자각하고 그 쓰기를 하나의 주제로 부각시키는 능력, 그리하여 시의 담화성을 인식하고 글쓰기에 대한 자기 반성적 성찰을 보여주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비유 혹은 상징의 중요성이 상실되고, 시의 구조가 분열화/해체화된 현대는, 어떤 언어를 동원한다 해도 그 언어를 통하여 현실 재현, 다시 말하면 사실주의적 의도를 성취할 수 없다. 현대는 인습적/관습적 시어가 소홀히 한, 인간 내면의 생생한 그 무엇을 시쓰기를 통하여 성찰하는 일, 그리하여 실제세계와 상상력으로 형상화된 언어세계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하여 시적 언어의 고정된 관념을 깨뜨리고 그 느낌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사고와 인식의 자유공간을 마련하는 실험 정신, 또 그리하여 현실과 환상사이의 긴장을 추구하여 기존 미학을 전복한 모더니티 미학이 필요한 시기이다.

 

문학예술에 대한 전정구의 지적

전정구의 지적대로 ''이라는 단어는 신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며, 구시대에 대한 신시대의 한 속성만도 아닌 것이, 문학예술 속에서의 그것은 창조의 자세 및 정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김준오도 80년대의 해체시를 일컬어 '예술 영점화'의 자세라고 했듯이, 이와 같은 경향이 강화되어 비록 21세기의 문학예술이 더이상 창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텍스트 지우기와 겹쳐쓰기, 베끼기 등으로 나타날지도 모르지만, 현재에서의 진단은 제한적이나마 창조의 정신으로서 새로움을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신세대를 약속없는 시대의 약속없는 세대라고 명명한 점에 대하여 좀더 고려해보자. 가령 전정구가 의도한 약속있는 시대가 운문의 시대, 즉 시의 시대였다면, 그의 의도는 시인들이 소설의 세계로, 저널리즘과의 천착으로 향하는 자세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로서 약속없음이라는 명제에 있다. '시인 자격증 시대' 라는, 즉 우리 문단에 옥석을 가리기 위한 시인자격 시험제도가 도입될지 모른다 라는, 그래서 21세기 시인자격을 유지하기 위하여 약속없는 세대, 신세대 시인들은 시쓰기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그의 현장진단이다.

'이들이 우리 삶 속의 모든 가치나 이데올로기를 가볍게 보고 그것들에 냉소를 보내거나 외면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은 아직 한국적 현실/실정에서 시기상조' 라는 진술에서 나타나듯이, 전정구는 신세대의 '약속없는 시쓰기'가 부정정신을 담지하지 못했을 때에 약속없음이라고 지적한다. 때문에 그가 해체시 군단 모두에게 부정적 일격을 가하는 것은 아니며, 또 그러할 수도 없음이 신세대의 글쓰기 모두가 모든 가치 및 모든 이데올로기에 냉소를 보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다소는 경색되어 '모든' 가치나 모든 '이데올로기' 라는 발언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좀더 이해를 넓혀, 해체적 글쓰기의 잠재된 목적이 약속되어 있는 시대의 약속되어 있는 세대로 향하는데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정구의 신세대 글쓰기에 대한 긍정적 안목을 <현대시에 나타난 성의 비유적 의미>에서 접할 수 있는데, 그는 이 부분에서는 신세대 시쓰기를 부정정신 담론이라는 시대 비판적 담론으로 보고 있다. '성은 적어도 시분야에서 변화된 현실을 표현하기 위한 비유로 훌륭히 활용되며, 이 금기의 소재는 현대적 삶의 내면을 비춰내는 거울, 혹은 도덕의 타락과 경제적 불평등의 비유물로 등장한다.' 라거나, '사회의 건강성은 항상 그 시대의 성 행태와 결부시켜 판단해야 하며, 윤리학자들이 주장하는 영원불변의 도덕 표준이 존재하지 않듯이, 성이 사회 의 삶과 연관이 없다는 논리도 어불성설이라는, 그래서 인간의 도덕한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성생활' 이라고 하여 성의 현실상에 대한 비유적 접근을 신세대 시쓰기의 부정정신 담론의 한 예로 밝히고 있다. 인간의 도덕 한계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성생활에 토대한 문학작품이듯이. 그중에서도 시에서의 그것은 시대의 건강상을 반추하는 주요 매개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금기의 소재로서 성 및 성적 이미지가 문학속에서는 오히려 금기의 타파로서, 그리고 자유추구의 발현태로서 사용되는데, 가령 지금의 에로스는 희랍시대 사랑의 신의 이름으로서 에로스였듯이, 로렌스 등의 서구 작가들의 작품에 와서 에로스의 회복은 이성중심주의에서 비롯되는 비인간적 현대성에 대한 인간성 회복차원의 담론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시에서도 성의 소재가 발현된 양태에 따라서 그 시대의 건강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시에서의 성의 진술유무 진술양상이 그 사회의 내적 외적 건강상을 비례적으로 반영한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은폐 금기시 되어온 성이 언어예술의 장치로 등장하였다는 사실은 언로의 뚫림을 대변하여 자유와 해방이라는 예술의 본원적 갈망을 대변했다고 볼 수 있다.

전정구도 시대에 뒤진 낡은 관념으로 규제하고 격리시켜 성을 금기시하는 태도는 마땅히 재고되어야 하며, 특정 소재를 너무 금지하니까 문제가 생긴다고 보아, 규제는 모든 것을 좋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더 나쁘게 만든다 라는, 즉 법의 단속은 매춘의 형태나 규모를 바꾸는 데 도움을 주지만, 매춘을 억제하는 효과는 없다고 지적하고 있듯이, 성의 소재는 금기의 대상이었고, 대상이기 때문에 들춰내려는 욕망 내지 욕구에서 비롯된 자유추구의 대명사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성이 우리 사회의 폐단을 진단하는 매개체라는 논리 역시 재론할 필요가 없을만큼 명약하다.

 

우리 문학의 해체된 현재

전정구에 의해 진단된 우리의 해체된 현재를 메울 수 있는 지향상 또한 나타나는데, 그것은 <홀로 깊고 깊은 세계에서 부르는 이슬 맺힌 노래> <우리를 설레게 하는 위안자> <함부로 그리운 겁나게 그리워하고픈 시인들> <서울의 야경, 그리고 생산적 성> <시대적 양심의 외침과 끈질긴 민중의 합성> 등에서 선배 시인들의 인간신뢰·자연신뢰의 세계, 그리고 사라져 가는 것들을 향한 그리움의 세계에 두고있다. 그것은 흔히 일컫듯이 전통 서정의 세계이다. 현대적 서정이라고도 칭하는 신서정의 실체는 전통 서정과의 교류속에서 그 건강성을 담지한다는 간접적 논리다.

따라서 건강한 신서정 회복을 위하여 무질서의 가면을 쓰고 있는 신세대의 가면이 벗겨져, 진실의 실체로서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이 회복되기를 꿈꾸는 전정구의 문학적 • 시적 인식은 <미래의 예술환경> 진단속에서 더욱 구체적이다. 그는 문화 산업화 시대의 문학예술의 반엘리트주의, 반권위주의, 반교양주의의 표방을 통한 문학의 · 시의 대중화작업을 긍정적으로 바라봄으로써, 대중예술/포퓰러아트 미학은 비판론자들이 우려한 대로 예술성의 소멸이 아니라, 예술의 기능이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대중문화는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상업주의적 소비문화의 성격이 짙으며, 우리 사회의 대중문화가 전통문화의 토대에서 형성되고 창출된 문화가 아니라,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모방에서 탄생된 사이비 이식문화에 가깝다는 점에서 대중문화 비판론을 경청할 필요를 역설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문화가 문화창조/향수 주체로서의 대중이 형성한 실천적 문화라는 사실을 폄하하는 시각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라는 지적과 함께 '21세기는 대중들의 축복에 해당되는 꼭 그만큼 고루한 예술가/전문가들의 불행을 예고하고 있으며, 예술의 위기라기 보다는 예술가의 위기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시대'라고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