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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의 역사적 전개과정

by 토끼투끼 2024. 7. 20.

윤여탁의 '시의 논리와 서정시의 역사'에서는 1920년대 민요시론 및 우리 현대시의 기점문제에 대한 출발과 함께 서정시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고찰하여, '지금 여기에서의 시'에서 오늘의 서정시의 위상을 짚고 있다. 그의 서정시에 대한 장르적 출발인식은 구비문학인 민요와의 관계망에 놓여있는데, 이는 서구에서도 서정시의 장르명이 lylico로서 그 어원이 수금(lyre)이라는 악기명에서 비롯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듯이, 서정시의 기원이 우리에게서도 구비문학과의 관계에 있음을 민요론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때문에 그의 일관된 논리는 서정시와 서정시의 하위장르로서 리얼리즘시에 놓여있는데, 이는 곧 서정시의 역사적 장르를 해명하기 위한 그의 규준이 되고 있다.

 

서정시의 역사적 전개과정
서정시의 역사적 전개과정

 

시에 대한 명칭 

그러나 현대에 와서 시에 대한 명칭이 Dichtung, poem (poetry) 등으로 명기되듯이 현대의 시에서는 노래로서 lylic이 아니라, 말하고 이야기하는 담론으로서의 시장르의 속성이 우세하기 때문에, 현대의 시를 재단하는 규준으로서 서정시도 노래가 아니라 서정성의 담지여부로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때 물론 문제는 서정성을 어떻게 볼 것이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윤여탁의 글에서 이에 대한 천착이 명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논리에서 시 또는 서정시의 하위장르로서 민요조 서정시 • 서사시·서술시 • 프로시 · 리얼리즘시 등이 등장하는데, 그 연구에 의하면, 첫째 민요조 서정시는 1920년대의 민요시를 민요조 서정시로 칭하여 김억 • 김소월 • 주요한 · 김동환 등의 서정 시인들이 민요의 부분적인 수용을 꾀하였고, 특히 근대시의 발달과정에서 개인적인 정서 표현이 급증하는 경향과 일치하여 감정의 직설적인 표출을 통하여 서정성을 획득하였다고 보고 있다.

1920년대 서사시에 있어서는 김동환의 <국경의 밤>과 김억의 <지새는 밤>을 내세워 이들이 조선 후기에 널리 구송된 서사 지향의 서사민요를 계승하였으며, 형상화한 세계는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시적 공간이라고 밝힌다. 이같은 서사 지향의 서술성, 감상성의 서사시는 1930년대의 단편 서사시나 1960년대 후반 이후의 서사시 제작과도 연계된 것으로 보고 있다.

1930년대의 서술시는 임화를 비롯한 카프계열의 시인들이 주로 쓴 것으로 보면서, 서술시가 시장르의 고유한 특성인 서정성, 낭만성과 더불어 대상의 총체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현실을 수용하였으며, 임화의 서술시 선택과정은 이상화 같은 시인의 영향과 당시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나타나는데, 이중에서 후자에 더 큰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카프계열의 시인들에 의해 사건표상의 서술시가 구호나 푸로파겐다적 효과를 획득하다가, 카프가 해산되고 객관적인 정세가 악화된 후 이야기 구조를 원용하여 시의 내면공간을 확보하려는 경향의 작품들이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리얼리즘시에 대해서는 '이용악론'을 통하여 논술하고 있는데, 연구관점을 '시적화자, 서정적 주체, 대상의 존재'라는 틀로서 재단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그의 논리를 좀더 따라가 보자.

 

시적 화자에 대한 연구

다양한 시적 화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리얼리즘을 성취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시 다시 말해서 서정시를 전통적인 서정시의 개념 규정에 얽매여 지나치게 한정할 필요는 없다. 물론 감정 표현이 서정시라는 데에는 필자도 동의를 한다. 그러나 이런 감정의 표현 양상은 다를 수 있다. 넓은 의미의 서정시라고 해서 서사시나 극시를 모두 포괄할 수는 없지만, 서사적인 요소나 극적인 요소가 시적 형상화에 개입할 수는 있다. 이런 측면에서 서술적인 구조를 지니는 서술시(단편 서사시)를 서정시의 다양한 범주 속에서 논의할 것을 우선 제안한다. 이야기를 동원하건, 사건을 동원하건, 사물을 동원하건 아니면 직접적으로 감정이나 사상을 표현하건 간에, 이들은 서정시의 형상화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즉 시적 대상이 다를 뿐이다. 이 각기 다른 시적 대상은 어떤 형태든지 시적 화자의 목소리에 의하여 표현된다. 때로는 은폐되고, 때로는 관찰자와 같은 서술자로 나타나고, 어떤 때에는 시적 주체가 되어 시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주인공, 등장 인물이 된다. - 중략 - 시에서의 리얼리즘 성취가 모든 시의 목표는 아니다.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리얼리즘은 현실 인식이라는 문제와 연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를 다루지 않은 시를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상에서 윤여탁은 서정시=서술시=단편 서사시=리얼리즘시=프로시라는 등식을 성립시키고 있는데(물론 이 등식은 백퍼센트 일치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서정시의 서정성이 서술시나 단편 서사시, 리얼리즘시에서만 나타날 것은 아니라는데 논리의 문제가 있다. 또 서술이라는 시적 장치도 리얼리즘시의 독점물은 아니다. 물론 '시적 화자라는 시의 자질이 리얼리즘의 열쇠는 아니라'고 윤여탁 스스로 인정하고 있긴 하지만, 그리고 '시가 표현하려는 내용, 정서 또는 사상이 리얼리즘 시의 문제가 된다.' 라고 리얼리즘시를 보는 잣대에 대해 밝히고 있지만, 그렇다면 이는 오히려 리얼리즘시로서 이용악론에 대한 '시적 화자' 라는 재단의 잣대를 스스로 부인하고 있는 오류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시가 표현하려는 내용, 정서, 사상이 리얼리즘시의 문제가 된다면, 리얼리즘의 규정을 위하여 논리의 잣대는 그렇게 세워졌어야 할 것이나. 그렇지 않고 '시적 화자'라는 관점을 택한 것은 리얼리즘시라는 결론을 미리 설정하여 놓았기 때문에 그 결론으로 향하여 가는 길은 어떤 길에 의해서건 가능하다는 결정론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곧 '좋은 시=리얼리즘 시'라는 새로운 등식 속에서 리얼리즘시가 아닌 시는 모두 좋은 시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또 다른 비합리를 빚고 있다. 물론 어떤 시를 좋은 시로 보느냐는 개인의 문학관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문제는 좋은 시 변별에 있어서 타자의 세계관을 얼마나 인정하느냐의 여부에서 시를 평가하는 규준의 객관성 성취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현대시의 기점 문제

<현대시의 기점 문제>에 나타난 그의 문학관도 좋은 시=리얼리즘시라는 일관된 논리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의 리얼리즘시라는 개념은 엄밀히 칭하여 마르크시즘에 기대어 있다. 리얼리즘시=프로시= 민중시=자유시=현대시 = 민족 문학이라는 관점에 따라 그는 임화의 일련의 시가 발표된 1929년을 현대시의 한 출발점으로 규정하면서, '김기진에 의하여 단편 서사시라고 명명되었던 임화의 프로시는 프로문학 내적으로는 대중화론을 촉발시키는 중요한 요인을 제공하고 있고, 이를 계기로 하여 우리 시문학사는 리얼리즘시라고 부를 수 있는 현대시의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그는 리얼리즘시라고 하는 개념과 프로시라는 개념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나, 프로시 중에서 리얼리즘의 일반적 특성에 합당한 시민이 본격적인 리얼리즘시라고 하면서, 리얼리즘 시가 프로시와는 달리 마르크시즘에 경도된 것이 아니라는 시각을 보이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리얼리즘시의 출처는 프로시의 범주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프로시= 리얼리즘시라고 보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이때 윤여탁의 주장대로 리얼리즘의 일반적 특성에 합당한 시만이 본격적 리얼리즘시라고 한다면, 리얼리즘의 '일반적 특성'과 '본격적 리얼리즘'의 성격이 무엇인가가 문제다. 또 '좋은 시=리얼리즘 시'라는 등식의 문제점과 함께 그가 의미한 리얼리즘시가 엄격한 사조적 개념의 리얼리즘시가 아니라면, 리얼리즘시 아닌 시가 없으리라는 생각이다. 문학은, 시는 어떤 형태로든 현실과의 관련하에서 탄생되기 때문에 리얼리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관점의 차이겠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의 좋은 시 반열에 든 시인들을 보면, <지금 여기에서의 시>에서 정호승, 김용택, 김영춘, 안도현 등이 속한다. 여기에서 윤여탁은 민중시도 서정성의 회복이라는 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를 역설하는데, 그 이유를 서정성 부재의 민중시가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무자각적으로 시의 서정성 담지여부가 독자층의 호응여부에 놓여있다는 의미를 말하고 있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시의 목적성, 즉 계몽성이 주요 안건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바로 여기에 '이 시대의 문학은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그의 역점이 있다.

윤여탁의 현대시의 개념문제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관점이 지배하고 있다. 그는 궁극적으로 현대시는 현대의 과제를 적절히 드러내고, 형상화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면서, 특히 우리의 경우에는 식민지 상태의 질곡을 제대로 형상화한 것이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모던이란 서구적 개념에 매달린 일련의 시들이나 전통적인 유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시들은 현대시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한다. 또 '민족 해방 운동과 계급 해방 운동의 측면을 적극적으로 표방하면서 본격적인 자유시를 실현한 현대시로서의 1920년대 후반의 리얼리즘시는 다른 논자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주장돼 온 현대시로의 모더니즘시의 출현과 더불어 시문학사에 정당한 자리매김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라고 하는데 리얼리즘시의 개념은 우리 것이며, 모더니즘시의 개념만이 서구적 개념에 해당하는지 의문을 남긴다. 또 다른 논자들에 의한 모더니즘시라는 현대시 반열에 리얼리즘시가 '더불어 자리매김 하기를 주장하는 것은 뜻있는 자세이면서도, 이는 곧 현대시 = 리얼리즘시라는 종래의 주장에서 현대시=리얼리즘시=모더니즘시라는 논리의 파행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