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정하거나 아니하거나, 그리고 원하거나 아니거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형들은 사회상으로 또는 정신영역으로 이미 그 모습들을 드러내어왔다. 이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시대가 유야무야 도래했다는 말이다. 서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부터 그 구체적 시기를 부여하고 있고, 우리의 경우 80년대의 정치·경제·사회 현실에서, 그리고 그에 준한 전략적 장치로서 '해체'라는 전통장르의 탈장르화 현상에서 그 구체적 양상을 접해온 이래, 90년대에는 사회의 일상에서도 그 첨예한 모습들을 만날 수 있다.
아직도 모더니즘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의 관계망 속에서 파악되는, 그리고 모더니티의 범주에 포함되는 성향으로 인하여, 그 이해를 위해서는 모더니즘의 이해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전체성에서 다양성으로'라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성 속에서도 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 보다 더 큰 위력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오늘의 기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을 그 출발점으로 해야 하리라. 마샬 버만 역시, '모더니즘은 왜 아직도 문제인가'라는 인식 아래 서구의 사회·문학·사상 등에 대한 어제 오늘의 그것을 지적하며, 인류의 미래상을 유추하듯이 말이다.
따라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현대화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자연과학에서의 위대한 발견들은 인간의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였고, 생활의 전반적인 흐름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인구증가, 도시의 발전, 사회를 통합하는 매스컴의 체계, 강력해지는 국가, 지배자들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의 거대한 사회운동 등, 자본주의 세계시장을 확장하기도 하고 뒤흔들기도 하는 모든 제도들에 의하여 20세기의 소용돌이를 유지하는 과정을 현대화라고 부르게 된다.
이와 같은 현대화의 주체로서, 그리고 그 대상이라는 이중의 기능속에서, 헤겔의 주체적 개인은 그 주체성을 점차 상실하여 대상화의 일방적 길에 가까워졌다. 대상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인간화에 가깝다면, 주체의 길을 모색하는 변증법적 자세는 모더니즘의 그것에 해당할 것이다. 즉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현대화 과정위에서 주체와 대상간의 변증법 또는 비변증법적 관계망에 따라, 그 모더니티의 차이를 파악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넓은 의미, 즉 현대라는 시대와 결부하여 모더니즘을 지칭할 때, 반항이라는 낭만적 의식에 기대어 낭만주의에서 부터 모더니즘의 정신적 기류를 찾는다. 반항의식은 기존체제 거부에 연결되기 때문에 모더니즘의 주체적 개인이 생활하는 현대화 속에서의 현대화 거부의식과 동궤로 보고 있다. 그 거부가 모색하는 하나의 지향태가 전통의 목가적정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를 반모더니즘, 또는 목가적 모더니즘이라고 버만은 칭하고 있다. 또 상징주의의 거장 보들레르에 이르러 최초의 진정한 모더니스트가 나타났고, 그는 이데아와 현대성의 교응을 상징적으로 처리하고자 의도하였기 때문에, 이에 따라 이데아의 세계를 목가적 모더니즘으로, 그리고 현대화의 양상들을 반목가적 모더니즘 영역으로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보들레르 · 엘리얼의 모더니즘은 전통과 연결된 세계관이라는 점 등으로 고전적 모더니즘으로 칭하는데, 달리 말하면, 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고전, 내지는 전통이라는 의미이다.
비변증법적 묘사장치
포스트모더니즘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오기 이전, 즉 모더니즘에서도 현대화의 소용돌이 현상 위주로 표출하는 비변증법적 묘사장치를 찾을 수 있다. 그 경우에는 모더니티 구현을 외적 장치에 기대어 세계관을 배재시킨 채 철저히 은폐의 자세나, 역설, 아이러니 등으로서 왜곡된 현실상의 보여주기(showing)를 의도하였다. 이는 현대화 속에서 미래를 향한 비전의 통로가 막혔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실체는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잠정적인 아름다움까지도 없다는 인식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양태는 보들레르 미학의 반쪽인 반목가적 모더니즘에 해당하는데, 이의 확장은 예술이 상실되고, 신성한 것이 세속적인 것으로 변모하여, 오히려 추·비속 조차 미학의 범주를 차지하는 모더니티의 한 성향으로서 그 실체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문제는 현재를 칭하여 포스트모던이라고 할때, 과연 포스트모더니즘이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부분적으로는 否의 대답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고전으로서 모더니즘이 여전하다는 것, 그것은 미래적 전망을 뜻하며, 동시에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현대화의 도정위에 있는 동일한 행보라는 사실이다.
지금은 진정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인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포스트모던적 감각과 그에 대한 주장은 첫째로 1960년대 초반에 미국 전역에 나타났으며, 둘째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프랑스에서 나타났다. 미국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팝(pop)이라는 해프닝(happening), 아상블라지(assemblage), 환경예술(environment) 및 예술을 창조하는 사람들에게서 비롯되었다. 어느 사조나 그렇듯이 포스트모더니즘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구체적 인식도 없이 행했고, 그 물결은 대중매체 및 스타일과 혼합하여 나타났다. 예술을 거리로 내몰았던 것이다.
둘째 국면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데리다, 바르트, 라캉, 푸코, 보드리야르 등의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자들에게서 모색된다. 이제 에로스, 혁명, 테러리즘, 잔인한 소유, 계시는 언어와 기표 및 텍스트에 작용하는 단순한 방법이 되었다. 이는 미와 신성의 세계가 거리로, 또는 세속의 세계로 추락한 극단에서 철학적 허무주의를 드러내는 형국이기도 하다. 이때 그 허무주의는 비극이라는 허무를 희극의 장치화로 이끌어내는 비생명적 현상에 가깝다.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허무주의적 인식과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 허무주의가 인간적 본질에 밀접한 허무주의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의 그것은 대량학살. 대량죽음. 대량생산의 현장에 결부되어 있다는 현대화의 한 비극적 단좌로서 허무주의이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허무주의적 전망에 놓여있는가 라고 할 때, 그 출발은 분명 현대화의 허무주의적 전망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모순의 현재에서 비롯된 허무의 전망을 해결하는 추동력을 그 자체 내에 지니고 있느냐에 대한 인식망이다.
니체 이전의 철학은 '존재,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존재론적·개념적 질문의 시대였다. 그러나 신이 죽어버린 니체의 시대에 '누가 인간인가'라는 개인적 질문차원에서 초인으로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가 탄생했다. 그러나 이제 '왜 인간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우리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신도 죽었고, 인간조차 죽어버린 시대란 인간이어야 할 충분조건이 불필요해졌기 때문이다. 희랍시대 이후 휴머니즘은 그 부정의 대상을 무엇으로 설정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직면해 왔지만, 특히 인간이어야 할 필요가 회미해진 이 시대에 여전히 휴머니즘이고자 한다면, 그 부정의 대상을 기술의 위력. 기계인간 등으로 상정할 수 있겠다. 기술시대의 기계인간이란 곧 니체의 '누가 인간을 극복하는가'의 '극복될 인간'이란 의미망에 내포된다는 말이다.
초인으로서 짜라투스트라는 '극복될 인간'을 극복하는 권력의지의 존재자로서, 긍정적 의지와 변화로 향하는 생성의 의지자로서 삶을 긍정하며, 생성을 긍정하는 존재이다. 이 긍정은 부정적인 것의 전환을 변이라고 부르는 니체적 생성의식이며, 파괴함으로써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성과 연결된다. 동시에 전통을 파괴하여 전통을 세우는 모더니즘의 전통 생성의식과도 연결된다. 그래서 기계인간을 극복해야 하는 인간은 여전히 니체적 초인이라는 대안으로 남는다.
다시 모더니즘으로
1980년대 서구를 비롯한 제3세계는 다시 모더니즘으로 향한다. 그것은 치료를 위한 모더니티, 즉 포스트모던 공간에서 외면했던 고전적 모더니즘, 혹은 전통주의자 보들레르 • 엘리얼의 의미를 되새기는 의식이며, 파괴의 고통을 치유하고자 하는 생성의 의식구조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보편적인 가치추구를 거부하는 한편, 특별한 경험, 지역적인 관심 및 언어 게임의 이질성에 바탕을 두는 현대화적 대중성 및 다양성에서 차연 및 탈중심의 개별성으로 벽허물기를 주장한다면, 모더니즘은 전통거부이면서도 동시에 동시적 질서로의 거부속에서 연속된 전통상에 그 몸체를 두고 있는 통합의, 내지는 전체성의 중심을 견지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목가적 질서의 회귀의식인 것이다. 따라서 마샬 버만이 '모더니즘은 왜 아직도 문제인가' 라는 언질 속에 미래의 한 방향을 열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사라졌는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닌 중심해체의 부정정신은 자유공간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탈중심의 긍정태로서 '지금, 여기'가 존재중심이라는 실존적 개인위치를 확대시켜 주는 효과조차 부인 할 수 없다. 문제는 진실한 것은 무엇인가 에 있으며, 또 왜 진실해야만 하는가에 의하여 이 시대의 전망을 찾는데 있을 것이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출현에는 세계사의 전쟁 및 전쟁상황과 무관하지 않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요인은 기계화 및 산업화에 따른 경제적 현대화와 더불어, 전통정신의 변혁으로서 탈중심의 다양성이라는 비극화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부정적 중심을 부정하는 부정의 정신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그 외형들이 부정의 형태로 돌출되었다고 해서, 그 정신의 기류조차 배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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